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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Aug 19. 2024

태권도 1단 vs 골프 1단

책 읽는 아들, 글 쓰는 아빠 #9

세상을 사는 건 숙제를 푸는 것과 같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친구들 사이의 경쟁은 멈출 줄을 몰랐다.

태권도 1품을 따던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던 운동회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 때, 그리고 초등학교 어린이 회장 선거까지, 어린 시절부터 경쟁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더구나 그 경쟁은 하나씩 차례대로 오는 법이 없었다. 여러 도전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친구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린 소년이든 중년 남성이든 똑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 앞에 서면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덧 나이 마흔을 넘기니,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처음 해보는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도 어릴 적보다 나아진 점이 있다면, 새로운 도전 앞에서 긴장된 마음을 감추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아무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경력 신입'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등 떠밀리듯 떠맡아야 할 때에도, 속으로는 불안해도 겉으로는 군말 없이 담담한 척 해낸다.


그럼에도 최근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잠까지 줄여가며 유튜브를 보고, 집을 나설 때도, 침대에 누워 온몸이 쑤실 때조차

'오늘 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일.


바로 골프다.


 



Liu Ming, 자네 언제 골프 칠 거야?

 

골프를 시작한 계기는 간단했다.

"Liu Ming, 자네 언제 골프 칠 거야?"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지도 벌써 2년 반. 매일 열두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니, 성실성 하나는 인정받은 모양이다. 덕분에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경력 신입'이라는 귀여운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게으른 구석이 있었다. 업무와 사회생활은 '먹고사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지만, 퇴근 후나 주말에 동료들과 어울리는 '친목 활동'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얼굴을 본 사람들과 또 시간을 보낸다니... 정말이지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나 보다. "골프 쳐봤나?"라는 질문이 시작이었다. "아니요."라고 대답했지만, 한 달 뒤 다시 "골프 좀 치나?"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여전히 "아니요."라고 답했지만, "오늘 스크린 갈 건데, 시간 되는가?"라는 물음에는 슬슬 머쓱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10월에 필드 예약했으니, 준비하도록 해요."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마지못해 골프 레슨을 시작했다. 주중 밤 11시에 한 시간씩, 주말 새벽과 잠들기 전까지 꼬박 두 시간씩 연습에 매달렸다.


하지만 골프는 참 고약한 운동이다. 

열심히 한다고 실력이 바로 느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은 어느새 8월로 앞당겨졌고, 골프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필드에 나가야 했다. 형편없는 모습을 보일까 두려웠고, 억울한 마음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남들 한번 칠 때... 도대체 몇 번을 쳐야하는 건지...


하지만 드넓은 필드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과 맑은 하늘을 보니, 예상치 못한 마음의 평화가 밀려왔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것에 먼저 안도해야 했지만, 내심 스스로가 조금 자랑스러웠다. 그 보람찬 기분을 혼자만 아는 비밀처럼 마음속에 간직하며 속으로 슬쩍 웃음 지었다.


물론 지금도 팔과 손가락이 아파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지만, 당근마켓에서 중고 골프채 알람이 울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들고 고민을 시작한다. 나도 이제 '골린이'가 되어가는 걸까?




책으로 배우는 태권도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은 국기원에서 발행한 '태권도 교본'이다. 나도 어린 시절 아들 심쿵이와 비슷한 나이에 일품을 땄지만, 그때는 이런 책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세월이 흐르며 태권도의 체계와 보급이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 책은 태권도의 시작인 '태극 1장'부터 마지막 정수인 '일여'까지, 각 구분 동작을 사진과 함께 세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금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지만, 심쿵이는 무엇이든 책으로 배우는 게 더 익숙한 모양이다. 책을 펴놓고 동작 하나하나를 자신의 몸짓과 비교하며, 모르는 부분은 묻고 또 묻고, 반복해서 연습한다.

심쿵이는 '파밤띠'를 따고 좋아했지만, 여기서는 '파밤띠'가 빠져 있는 게 조금 아쉽다.


태권도를 해봤거나 자녀가 태권도를 배우는 부모라면 알겠지만, 세상에 이렇게 색깔이 다양한 띠가 있을 줄은 몰랐다. 심쿵이는 파밤띠 심사를 보기 전 날, 파밤 띠에 대해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 저녁, 심쿵이가 갑자기 저녁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거실 한복판에서 품새를 시작했다.


나도 어린 시절 심사를 할 때쯤이면, 긴장해서 품새를 반복하곤 했는데, 아들이 그런 모습을 보니 새삼 라이온 킹의 'Circle of Life'가 머리를 스쳤다. 세대가 바뀌어도 반복되는 이 풍경이, 묘하게 뿌듯하고 웃음이 났다. 


그나저나 나의 골프 실력은, '흰띠'는 벗어난 것이 맞을까?




부자의 숙제, 태권도 1품 그리고 골프 1단


심쿵이와 하나의 약속을 했다. 

심쿵이는 태권도 1품에 도전하고, 나는 골프에서 나름의 1단을 따기로.

그리고 드디어, 심쿵이가 태권도 1품 심사에 나서는 날이 왔다. 1품을 따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니, 심쿵이는 작은 도전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앗! 앗! 앗!"

찌는 듯한 여름, 에어컨도 없는 국기원의 복도는 마치 거대한 사우나처럼 후끈거렸다. 에어컨은커녕 창문도 제대로 없는 복도에서 빳빳한 도복을 입은 아이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각자 차례를 기다렸다. 심쿵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굴엔 작은 땀방울이 맺혔지만, 눈빛만큼은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심쿵아! 목표를 향해 멋지게 발을 들어 올려!


드디어 심쿵이 차례가 왔다.

심쿵이는 놀랍도록 침착하게 태권도 품새를 완벽하게 해냈다. 가슴이 뭉클했다. 나중에 들으니, 국기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스스로를 응원했다고 한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대견하고, 또 귀여웠다.


다음 날 저녁, 태권도 관장님을 만나고 돌아온 심쿵이는 더위에 지친 나에게 환하게 웃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아빠! 나 예비 품띠다~!”


그 순간,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 아들이 이렇게 자라,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구나.’ 심쿵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뿌듯함이 솟아났다. 그런데 그 뿌듯함은 곧 내 상황으로 이어졌다.

‘나는 언제쯤 골프 1단이 될까? 골프 1단은 대체 몇 타를 쳐야 하는 걸까?’


심쿵이의 1품 도전이 끝난 날, 나는 아픈 팔에 맨소래담을 바르고 억지로 연습장으로 향했다. 마치 아들이 꾸준히 태권도장에 나가서 연습하듯이, 나도 골프 1단을 향해 다시 노력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온몸에 맨소래담 냄새가 지독하지만, 아들과 함께 도전을 이어가는 이 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며, 속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심쿵이는 태권도 1품을 땄지만, 나는 아직 골프 1단이 되려면 갈 길이 멀었다.

그래도 아들이나 나나, 각자의 도전은 계속된다.


도전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작은 승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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