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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닷새부터 열이레 강원도 자연 체험과 세니네

by 준환

8.18.(목) 맑은 후 구름 (19.(금) 구름 다음 비)


강원도 자연 체험


강릉의 자연환경은 다양하다. 바닷가를 따라 아름다운 항구와 해수욕장이 줄지었고 습지나 석호도 있다. 내륙으로는 태백산맥을 이룬 오대산이 높이 섰다. 막연히 시작한 한달살이 동안 갈 곳이 많아서 즐거웠다. 손님들이 찾은 지난 두 주 동안 실내 전시관이나 바다 수영을 즐겼으나 이제는 산과 숲을 찾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영진리에서 강릉 시내 쪽으로 놓인 다리는 연곡천 하류를 지난다. 주변 모래톱은 연곡해수욕장.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백사장 안쪽에는 상당히 넓은 숲이 있다. 둘레가 어른 아름 하나 넘는 큰 소나무 그늘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휴식하기 좋은 장소였다. 예니네가 추천한 야영장이 문득 떠올라 캠핑을 준비했다. 여행지에서 떠나는 작은 여행지인 셈.


이곳은 카라반과 나무 덱, 노지로 나뉜다. 해변 가까이 온수 샤워장과 취사장이 있어 어느 것을 선택해도 길게 묵기에 무리 없을 듯했다. 넓은 나무 덱을 하나 빌렸다. 중고로 산 육 인용 텐트와 얻은 의자는 비록 주변의 고급스럽고 커다란 장비들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초보 캠핑족에게 부족하지 않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저녁거리를 사 와 이른 시간 비비큐를 시작했다. 나무와 풀냄새 맡으며 누그러진 햇살, 그늘에서 조금은 들뜬 채 크게 웃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참 지나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수평선으로 해가 져 어스름했다. 선선한 바닷바람 맞으며 산책하는 길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키 낮은 가로등이 수정처럼 환히 빛났다. 텐트로 돌아와 창을 모두 닫고 이불에 파고들었다. 숲 속에서 하루는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었다.



아침이 되어 돌아갈 시간 아이가 너무 아쉬워했다. 제주도처럼 마음 놓고 쿵쾅대며 큰소리 낼 수 있어 당연한지 모른다. 하루 더 있자고 조르는 걸 나 역시 편안해 잠시 망설였으나 다시 오자 달랬다.


오대산 소금강은 영진리에서 가깝지만 길은 제법 험하다. 진부면으로 가는 진고개로에서 갈라져 경내로 들어가니 경사가 크고 구불구불했다. 오가는 차가 드물고 이따금 보이는 민가를 빼고는 인적도 없어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십여 분을 죽 따라갔다.


짧게 산행하자 했다. 소금강 구간은 지원센터 입구에서 노인봉까지로 편도 약 십 킬로미터, 여섯 시간이 걸린다. 오대산은 그동안 가 본 산들과 달랐다. 걷는 내내 풍광 좋은 계곡이 바로 곁에 있었다. 요 며칠 내린 비로 크게 불어난 물은 넓고 깊은 곳에서 멈춘 듯 고요하다가 돌 많고 좁은 지점을 지나 세차게 흘러내렸다. 높은 곳, 폭포가 되어 떨어지더니 그 아래로 가늠되지 않는 용소를 만들었다. 계곡 위 산비탈에는 곧은 소나무가 까마득히 높게 자랐다. 빛이 들지 않는 아랫동은 매끈하고 위로 갈수록 많은 볕을 받으려 평평하고 길게 하늘을 덮었다. 산길 따라 무릉계폭, 십자소, 연화담이 금강산을 작게 줄여놓은 모양 그대로를 간직했다. 더 위쪽은 구룡폭포를 시작으로 삼, 광, 낙영폭포가 있고 선녀탕, 만물상, 백운대 같은 소와 기암괴석이 많았다. 나머지 절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걸어 식당암에 멈춰 섰다. 올라오는 동안 소금강 대부분 명소를 볼 수 있어 더 오르지 못한 것이 크게 아쉽지 않았다.


식당암(食堂巖)은 널찍하고 기울기가 완만한 계류 가에 있는 화강석 바위다. 여기에는 오랜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마의태자는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한눈에도 백 명은 함께 앉을 정도로 넓은 이곳에서 군사들을 조련하며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이율곡은 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외할머니 병구완을 위해 벼슬을 잠시 그만두고 강릉으로 내려온 어느 하루, 인근에 경치 좋고 인적 드문 선경이 있다는 말에 네 명의 동료와 산행을 떠났다. 오죽헌에서 시작된 길은 큰비를 만나 이박삼일 만에 갑작스레 중단되는데 그곳이 식당암이었다. 바위에 앉아 바라본 위쪽은 좁은 길이 이어졌다가 나무에 가려 끊어졌다. 그 길로 쭉 올라가면 사람 사는 세상과 다른 세계가 나올듯했다. 이율곡은 식당암을 비선암(秘仙巖), 골짜기를 천유동(天遊洞), 절벽 바위 밑은 경담(鏡潭), 산 전체는 청학산(靑鶴山)으로 이름 지었다. 식당암 부근은 그가 지은 이름 그대로 거울처럼 맑고 신비로웠다.


내려오며 금강사로 갔다. 길가에는 절 안에서 끌어온 물로 만든 약수터가 있어 오가는 여행자들이 목을 축였다. 청량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바깥을 둘러보았다. 담벼락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일정한 모양 없이 쌓은 데다 오랜 세월 푸른 이끼가 끼어 자연스럽고 운치 있었다. 비슷한 분위기의 울퉁불퉁한 돌계단 위로 사람 하나 드나들 만한 나무문이 열렸다. 안은 산길과 절벽 사이 비탈진 좁은 땅에 석축을 쌓아 넓힌 탓인지 크기가 아담했다. 말끔한 대웅전의 화려한 단청, 그 위에 올려진 짙은 회색 기와는 본디 자연의 색을 띤 절벽과 숲에 대비되어 세련미가 도드라졌다. 향냄새에 끌려 들어가 잠시 앉아 쉬다 뒤편 가파른 계단 끝에 있는 산신각으로 올라갔다. 전체 경내뿐 아니라 앞 산길과 냇가, 그 너머 산과 봉우리까지 모두 보였다. 높은 소나무 꼭대기에 가지는 해가 잘 드는 쪽을 따라 뭉게구름 모양으로 편편하고 넓게 누웠다. 소금강 계곡을 향해 지어져 사시사철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공원 입구에서 소금강 반대편으로 계곡을 건너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그 길은 상당히 큰 야영장으로 이어졌다. 카라반과 노지는 그간 많이 보았으나 솔막은 처음이었다. 숲 속 작은 집에 끌려 다음 주 하루 묵기로 했다.



8.20.(토) 흐림


세니네


새벽 동생 가족이 왔다. 강원도로 넘어오다 큰비를 만나 많이 늦었다. 올해 8월은 비가 유달리 자주 내린다.


야니와 동생의 두 딸, 오랜만에 만난 세 아이는 부족한 잠에도 활기찼다. 이른 아침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좁은 집안에서 술래잡기로 우당탕 쿵쾅 이리저리 뛰어 소란스러웠다. 지니네가 있을 때처럼 아랫집 할아버지가 올라오실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여행지만큼은 맘 놓고 뛰어놀아야 해 서둘러 영진해변으로 나왔다.


기온이 떨어진 데다 한창 휴가철도 지나 한산했다. 아이들은 튜브에 앉아 요동치며 쉼 없이 깔깔댔다. 어떤 것 보다 기분 좋은 소리. 한 명 들어갈 만한 넓이로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니 큰딸 세니가 이어받아 쉼 없이 모래를 퍼 올렸다. 처음에는 단순했으나 무너진 모래를 퍼내고 올라오는 계단을 만들기도 하며 점점 정교해졌다. 만족한 모양이 되자 그대로 앉아 주위를 살피는 동물마냥 머리만 내밀었다. 혼자 차지한 아지트였다.


일곱이 되어 넉넉한 저녁. 옛말처럼 아이들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내일 일찍 돌아간다는데 이번 주 가장 맑은 날씨가 예보되었다. 좀 더 누리면 좋으련만.


여름 바다가 저물어 감과 함께 강릉 한달살이는 절반을 지났다. 큰 고민 없이 손님들이 있는 날은 가까운 데로, 없는 날은 멀리까지 돌아봤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기억에 남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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