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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날과 스무하루 오대산 산행과 야영, 강릉대도호부

by 준환

8.23.(화) 흐림, 비


진고개에서 노인봉 그리고 야영


오대산은 봉우리가 여럿이다. 저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진고개 노인봉 코스가 가장 짧다. 왕복 팔 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는 비교적 평탄해 세 시간 안에 다녀올 수 있다. 지난 며칠처럼 오늘 역시 흐리지만 비는 예보되지 않았다.


진고개는 평창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꼭대기에 있다. 연곡천을 따라 난 평탄한 도로가 끝나고 급한 경사로에 들어서 힘겨운 엔진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부슬비에서 시작해 굵어진 빗줄기와 뿌연 안개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록 미시령이나 한계령만큼은 아니지만 길이 구불구불해 밤에는 편히 지나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구백육십 미터 진고개 커다란 안내판 앞에 섰다. 이곳은 노인봉을 지나 며칠 전 갔던 소금강탐방지원센터까지 긴 등산로로 연결된다. 다음번은 종주를 기대하며 정상을 향해갔다. 나무 덱 계단을 올라 고위평탄면에 들어서니 비탈진 한쪽이 넓게 트여 있어 맑은 날은 바다까지 보일 듯했다. 안개가 자욱한 데다 오르막길이 많이 남아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짧은 평지가 끝나고 나타난 나무 계단은 무성한 초목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틈틈이 달콤한 젤리와 커피로 힘을 채우며 가다 서다 처음으로 등산객과 마주쳤다. 일찌감치 시작해 벌써 노인봉에 다녀온 노인 두 분이 부러워 멀리 지나칠 때까지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한동안 숲 속 별다른 볼 것 없이 큰 나무와 돌계단만 나타나 아내와 아이는 점점 얼굴을 비죽댔다. 간간이 업고 달래 계속 걸었으나 비바람이 심해져 감기가 걱정되었다. 중도에 그만두고 내려오는 길 아쉬움 가득한 나와 달리 힘이 넘친 아이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었다.



올라갔을 때는 빠르게 지나쳤던 고위평탄면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누군가 별명 지은 강원도 알프스는 산길 양옆으로 아름다운 들꽃과 드문드문 작은 떨기나무가 가득했다. 오래전 화전민들이 남긴 고단한 자취가 긴 시간 나무와 풀에 덮여 평온해졌다. 하늘과 들판 모두 희끄무레한 안개에 잠겨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속을 헤엄치듯 느릿하게 걸었다.


진고개 정상으로 돌아와 평창 월정사에 들르고 싶었다. 하지만 추적추적 비 내리는 저녁, 길게 굽이친 길을 다시 건너올 게 두려워 하루 묵을 소금강 야영지에 바로 갔다. 솔막은 주방과 화장실만 빼고 모두 갖춘 숲 속 작은 집이다. 비 가림 아래 그릴을 펼쳐놓고 고기와 채소를 구웠다. 지난봄 길러 수확한 감자가 삼겹살에서 흐른 기름을 만나 겉이 바삭하고 고소했다. 서늘한 첩첩산중 별 쏟아지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계속 날씨가 흐렸다. 대신 가랑비와 풀벌레 우는 소리 가득한 낭만이 있었다.



8.24.(수) 흐린 후 비


강릉대도호부


연등(燃燈)은 부처에게 공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신라 경문왕 시절부터 탄생일에 등불을 켜 욕심과 집착으로 어두워진 세상이 그의 지혜로 밝혀지길 기원했다. 그 당시 정월과 2월 두 차례 열리던 것은 고려 중기 들어 사월 초파일 한 번 더 개최되었다. 등불을 단 기둥은 자녀의 수에 따랐고 남보다 크고 높은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여러 형태에서 연꽃 모양을 가장 많이 달면서 지금과 같은 풍습으로 굳어졌다. 연등의 본래 모습인 연꽃은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강릉 시내로 가던 길 야외 식물원에서 우연히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작은 습지 가운데 녹색 잎과 줄기 사이로 등 만 한 커다란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었다. 불 밝힌 것보다 환한 꽃잎이 분홍색에서 흰색으로 옅어졌고 티 하나 없이 맑았다. 그에 더해진 노란색 수술과 연두색 씨방은 마침내 경이로운 꽃 한 송이를 완성했다. 고대 이집트와 인도에서는 신성이 부여된 영원 불사의 상징이었고 불교는 부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피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처음 마주하는 꽃은 황홀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생명에 빠져 한동안 넋을 잃었다.



강릉은 과거에도 강원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고려부터 행정기관인 대도호부가 설치되어 영동과 영서를 관장했고 조선에도 이어졌다. 오죽헌이나 선교장처럼 의미 깊은 건물들을 돌아볼 때마다 곁에 있던 강릉 관아까지 오려했으나 그때마다 연이 닿지 않기를 세 차례, 이제야 닿았다. 도심에 있어 근처 도로는 좁고 복잡했다. 차 댈 곳이 없어 조금 떨어진 시장 옆 남대천 가에 내려걸었다. 잠시 길을 잃다 지도를 따라 이어진 주택가로 접어들자 구수한 커피 향이 물씬 풍겼다. 주위는 이삼 층 옛날 집들이 드문드문 찻집으로 변했고 골목 안쪽에는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으로 보이는 것도 있어 매우 고풍스러웠다. 우연히 발견한 강릉 카페거리. 비록 유명한 집에 앉아 분위기를 느끼지는 못했으나 짧은 시간 여행의 묘미가 느껴졌다.


대도호부는 칠사당과 임영관삼문을 빼고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었다. 그 터는 이후 수십 년 간 보통학교가 들어섰다가 약 이십 년 전 잘 단장된 예전 모습으로 대부분 돌아왔다. 정문인 아문, 강릉 사또가 집무하는 동헌을 지나 가장 안쪽에 사신들의 숙소인 객사가 있다. 세 칸으로 된 객사는 다른 지방 관아도 그렇듯 가운데에 왕을 상징하는 나무 전패를 모셨고 양쪽에는 주로 중앙에서 잠시 파견된 관리들이 묵었다. 동헌 왼쪽에는 대도호부사와 아전들이 묵으며 일곱 가지 주요 업무를 본 칠사당이 있고 그 뒤로 이곳에서 가장 높은 의운루가 들어섰다. 반듯한 돌로 쌓은 축대에 있어 객사에서와 함께 관아 전체가 고스란히 보였다. 안이 보이지 않게 담벼락이 둘러쳐졌다면 들어가 보고서야 이런 배치를 알았을 텐데 큰길 건너편에서도 대도호부의 윤곽을 이미 알 수 있었다.


정문과 안쪽 담은 어른 가슴 높이였다. 위압과 권위를 풍기는 서울 왕궁과 달리 안이 훤히 들여다보여 이웃집인 양 친근했다. 조금씩 높아지는 길을 따라 객사로 갔다. 임영문은 객사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비록 일제강점기 해체 보수되어 조금 달라졌으나 관공서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나무 건축물로 강원도가 가진 유일한 국보 건축물이기도 하다. 단청 없이 원형 그대로 긴 풍화를 맞아 화려하지 않지만 고졸한 멋이 있었다.



지금은 드나들지 않는 대신 담 한쪽을 헐어 문 없는 출입구를 낸 게 이채로웠다. 문 위쪽에는 푸른색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있다. 고려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전국을 유람하다 양양 낙산사에 가기 전 쉬어가려 잠시 들렀다. 마침 큰 비가 내려 날이 개기까지 열흘을 머무르며 강릉의 별호인 ‘임영’을 붙인 ‘임영문(臨瀛門)’ 친필을 남겼고 이를 나무에 새겼다. 커다란 글자에서 반듯하고 힘 있는 필체가 느껴졌다. 객사에서 가장 앞쪽 중대청에 앉았다. 일제가 칠십 센티미터를 높여 보수하기 전만 해도 멀리 남산이 보였다고 했는데 지금은 앞이 조금 가렸다. 나무 전패를 모신 전대청에서는 조선시대 매월 초하루와 주요 절기, 왕과 왕비 탄생일 궁궐을 바라보고 예를 올렸다. 모든 내용은 함께한 문화해설사님의 말, 하나하나 흥미로웠다. 다른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관아 안에는 꼭 심어야 할 나무가 세 가지란다. 대나무는 갑자기 폭동이 일어나 병기창까지 갈 여유가 없을 때 무기로 대신 썼다. 매실나무에서 딴 백매와 오매는 약재로 사용했다. 뽕나무는 조선시대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 날짜를 정하기 위해 길렀다. 내명부에서는 누에 치는 행사를 벌이려 2월에서 3월 사이 지역마다 뽕잎을 올리도록 했고 그 상태를 확인해 적당한 때를 골랐다. 또 조선시대 단청 채색과 배흘림기둥 건축이 가능한 건 사찰 법당인 대웅전, 궁궐, 관청이다. 예전 머슴들은 아침마다 안뜰에서 비질했다. 그들은 나뭇잎이 아닌 날아온 풀씨를 쓸었다.


도호부를 나와 가까운 중앙시장에 들렀다. 길거리에 서서 명물 어묵 크로켓을 맛보고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샀다. 아이는 포도와 떡갈비, 나는 편육, 아내는 샌드과자로 한 아름이 되었다. 시장 쇼핑은 적은 돈으로 큰 행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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