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월) 흐리고 비
오죽헌
초당순두부길과 난설헌로는 항상 북적인다. 순두부를 맛보러 간 8월 초는 휴가철 성수기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 후로도 비슷해 다시 찾지 않았으나 이번 주를 끝으로 돌아가는 일정, 아내는 그 골목에 있는 흑임자라테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차 안에서 바라본 가게 앞은 줄이 짧았다. 십 분 내외면 충분하겠다 싶어 둘을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그 뒤로 몇 배는 더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장사진. 포기하고 돌아오는 둘과 부드러운 단맛이 잊히지 않던 딸기 크레이프 집으로 갔다. 겹겹이 쌓은 크레이프 사이 생크림과 얇게 썬 딸기가 조화로워 자꾸 입맛을 당겼다.
오늘 간 곳은 오죽헌. 강릉대도호부에서처럼 해설사를 기다렸다가 동행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율곡 이이가 일곱 살까지 자란 곳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된 한 채의 별당이다.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로 육백 년 동안 몇 차례 보수를 거치긴 했으나 처음 지어진 무렵 날개 모양의 공포인 익공양식을 그대로 유지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오죽헌이란 이름은 외사촌 권처균의 호에서 비롯되었다. 할머니로부터 조상 묘를 돌보는 조건으로 물려받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많은 것을 따라 스스로 오죽헌이라 지었고 그대로 집 이름이 되었다.
※ 공포는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부재이다. 익공양식은 공포를 놓는 방법의 하나로 고려시대 주심포(기둥 위에만 공포를 놓는 방식)에서 조선시대 다포양식(기둥 위는 물론 그 사이에도 공포를 두는 방식)으로 변천하는 과정의 중간에 있으며 남아있는 건축물이 드물다.
오죽은 독특했다. 까만색인 줄로만 알았으나 여느 대나무처럼 초록색으로 시작해 갈색 그리고 까만색으로 변하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는 하얗게 되었다. 십 미터 높이도 넘는 굵은 것들이 집 뒤편 언덕에 빽빽이 숲을 이루었다. 오죽헌 곁에는 세월을 함께한 나무가 많았다. 앞쪽에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고 지우는 배롱나무가 있다. 껍질이 벗겨지고 다시 나는 게 스스로 일깨우는 모습을 연상케 해 선비 집안에서 많이 심는다고 한다. 간지럼에 가지 끝이 움직인다는 설명에 잠깐 문지르니 조금 흔들려 보이기도 했다. 뒤편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가 있다. 표면에 버섯이 자랄 정도로 고목이지만 여전히 꽃과 열매를 맺었다. 두 그루 모두 집과 나이가 같다. 이곳에서 가장 어린 나무는 백 년도 훌쩍 넘은 굵은 소나무다.
문성사는 이이를 모신 사당으로 오죽헌 왼쪽에 있다. 지붕을 받치는 앞 기둥은 아홉 번 장원급제한 기운을 받길 바라는 사람마다 만지는 통에 만질만질하게 윤이 났다. 오죽헌 뒷문은 사임당이 태어나고 후손들이 살기도 했던 안채와 사랑채로 이어졌다. 통로는 잦은 바람을 막기 위해 ‘ㄴ’자였으나 지금은 방문객을 위해 일자로 텄다는 해설이다. 건물마다 굴뚝 높이가 달라 가운데 사랑채는 높고 담벼락 가까운 방 옆은 낮았다. 높은 건 난방에 유리하고 낮은 건 연기가 넓게 퍼져 해충을 쉽게 쫓을 수 있다고 한다. 한옥은 방뿐 아니라 굴뚝조차 쓰임새가 모두 달랐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는 ‘어제각’이 있다. 정조는 오죽헌에 율곡이 쓰던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관되어 있다는 말에 두 물품을 잘 간수하라 당부했다. 그 분부에 따라 지어진 작은 전각에는 커다란 현판 위 그 세 글자가 쓰여있다. ‘어’ 자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간 게 스스로 뽐내고 싶어 한 모양. 아마 임금을 뜻하기 때문인 듯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해 이이가 지었다는 격몽요결 앞에 섰다. 돌아가면 일곱 살 우리 아이에게도 성인의 가르침을 알려볼까 한다.
8.30.(화) 비
십 년 전 기억
어제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는다. 컵 만들기 체험과 허난설헌 기념관에 가려 했으나 찌뿌둥한 날 때문인지 몸도 따라 무거웠다. 숙소에서 한나절 빈둥대다가 점심이 되어서야 나갔다.
서울 사람 서울 구경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동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자주 가는 마트나 음식점 한두 군데만 알았을 뿐. 멀리 가기 어려운 날씨, 여행이 시들해진 지금에야 가까운 곳 둘러볼 생각이 들었다. 우산 쓰고 언덕에 있는 나 홀로 아파트를 지나 밭과 밭 사이 샛길을 걸었다.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나 산골짜기에 있는 느낌이었다. 도로에서 떨어진 작은 숲이 있는 이쪽 숙소에 묵었다면 지금까지와 다른 전원생활일 듯했다.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길 텐트 야영을 했던 연곡해변이 보였다. 오늘 저녁 역시 그곳에서 보낼까 하다 즐기는 시간에 비해 번거로운 게 많아 그만두었다. 반대편 영진해변 방파제 끝으로 등대가 눈에 들어왔다. 몇 번 낚시한 곳이라는 말에 호기심 생긴 아내와 함께 가까이 갔다. 등대는 모두 왜 빨간색일까? 청회색 하늘과 바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색깔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영진해변은 강릉의 다른 곳 못지않게 카페거리로 유명하다. 어제 가지 못한 흑임자라테 파는 작은 카페로 갔다. 평일 오후에도 사람이 많아 구석에 앉았다가 마침 난 바다 보이는 빈 테이블로 옮겨 한 잔씩 시켰다. 그토록 기대한 맛은 어떨까? 단맛 뒤에는 고소했고 크림도 들어간 듯 부드러웠다. 얼음이 녹으면서 연해졌으나 여전히 진한 풍미를 이어갔다. 다만 몇 시간 후 속이 불편해 두 번 고르기는 주저할 거 같았다.
여행지를 떠날 때마다 다시올 기약 없어 아쉬웠지만 때때로 우연히 기회를 맞는다. 돌아오는 길 십 년 전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오월쯤 아내와 첫 여행 하며 언덕에 있는 아름다운 펜션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걸어 내려왔던 흙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펜션 앞 “숙박 손님 외 출입제한”이라 쓰인 팻말에 숨죽인 종종걸음으로 꼭대기까지 이어진 계단을 따라 종탑 모양 테라스에 닿았다. 마을은 전보다 번화했고 높은 건물이 들어서 시야가 가렸다. 다만 거리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아 친숙했다. 지난 이월 강릉 숙소를 구하려고 열 곳 넘게 메시지 보낸 곳 중에서 동해시와 이곳 영진리만 답이 왔다. 아내는 삼십 평 되는 동해시 숙소를 두고 작은 영진리를 선택했다. 나 또한 십 년 만에 같은 동네를 간다는 데 필연이라 느꼈다. 돌아와 되살아난 기억은 새로운 추억과 만나 즐거움이 깊어졌다. 둘에서 셋이 된 지금 강릉을 나오며 그 펜션에 묵을까 했으나 여전히 인기가 많아 빈방이 없었다.
숙소에서 쉬며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란 노래를 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울리는 나지막한 음조와 함께 귀에 꽂힌 건 가사였다. 힘들어하는 ‘나’를 받아준 사람에게 의지했으나 정작 떠올린 건 다른 사람이었다는 내용. 동조할 수 없지만 공감하는 이유는 용기 없는 우리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표현해서였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