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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여드레와 스무아흐레 세상을 대하는 자세, 선자령

강릉 컵박물관, 허준 허난설헌 기념관

by 준환

8.31.(수) 흐리고 갬


세상을 대하는 자세


안목해변 가는 길에 컵 박물관이 있다. 화가인 설립자가 여러 곳에 여행하며 모은 전시품은 이천여 점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것은 빗살무늬 토기부터 서울올림픽 기념 컵까지 시대별로 있었고, 매끈한 중국 자기와 잉카의 거친 진흙 그릇, 아프리카의 소뿔 잔과 유럽에서 만든 유리나 금속 술잔 같은 외국 것도 다양했다. 지역 환경과 특색이 여러 재질로 만들어진 크고 작은 컵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장 많이 보관된 건 유럽 자기들이었다. 자기 제조는 17세기 절대왕정 들어 주요 산업이 되었다. 생산기술이 이전보다 진보된 공방은 왕실의 지원을 받아 나라마다 고유한 전통과 창의성을 담아 화려한 예술을 꽃피웠다. 그렇게 태어난 자기는 어떤 면에서 원류인 중국보다 세련되고 정교했다.


컵은 오래전부터 단순한 도구뿐 아니라 의식이나 제례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박물관 한쪽 벽면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입술에 직접 닿도록 만들어진 유일한 그릇이다.” 컵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담긴 것으로 한여름 시원함과 추운 겨울 따뜻함을 얻었고, 나름 부여된 의미로 인해 기쁨에 더 큰 기쁨이 슬픔에는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트로피가 잔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데 모두가 공감했고, 카피라이터 정철이 쓴 <종이컵에게>처럼 종이컵은 ‘싸구려’나 ‘허접한’ 용기에서 ‘촛불을 담는’ 용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 트로피는 18C 처음으로 영국 경마대회에서 우승자가 술 따라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그전까지 둥근 공 등 다양한 형태였다.


이층에는 미술관이 있다. 설립자 작품과 해외 현대 화가 초청작, 국내외 개인 소장품들이 상당히 많았다. 저마다 독특하지만 난해한 그림 앞에서 문득 대학 미술 교양수업이 떠올랐다. 화방을 둘러보고 소감문 내는 과제가 있어 개인 아틀리에가 늘어선 강남 소로를 걸을 때였다. 우연히 본 백남준 작품. 텔레비전 비디오 아트 한 점과 은지화였다. 대표작인 비디오 아트야 그렇다 쳐도 주인은 낙서에 불과한 구겨진 작은 그림을 액자에 넣어 소중히 전시하고 있었다. 그가 미술품을 대하는 생각이 궁금했다. “그림을 이해하기 어렵네요. 어떻게 봐야 하는 거죠?”란 질문에 “특별한 건 없어요.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시면 되죠.”란 답이 돌아왔다. 현대 회화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몇몇은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장욱진은 ‘나무’란 제목의 엽서만 한 작은 크기로 큰 나무 아래 뛰노는 아이를 그렸다. 오십 넘은 화가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 중국 조각가의 ‘독서하는 여인’은 청동 조각품이다. 머리를 일자로 흩날리며 엎드려 책 읽는 자세가 편안하고 따듯했다. 작품에 없는 풀밭과 바람, 햇살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우루과이 화가 Souza Rocha의 회화 Deep sea는 세련미가 물씬 풍겼다. 짙은 회색의 바다는 정면에서 바라본 청록색 돛단배를 감쌌다. 물감이 번지게 한 채색과 선명한 색 대비로 거친 바다를 헤쳐가는 모습이 강렬하게 남았다.



일 층으로 내려가 포켓몬스터와 고양이를 컵에 그려 넣는 데 여념 없는 아이와 아내를 만났다. 머그잔에 그려 넣은 것을 구워 주어서 또 한 번 강릉을 추억하게 했다.


강릉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위인 기념관 둘이 있다. 며칠 전 오죽헌과 오늘 본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27세에 요절한 허난설헌은 빼어난 문장가였으나 여성 신분의 한계에 묻혔다.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높은 관직에 오른 허균 또한 시대가 인정한 문인이었다. 다만 사상은 유교에 얽매이지 않고 불교를 가까이해 파직되기 여러 번이었다. 남매가 자유로운 기풍을 같이한 건 서얼이었던 손곡 이달에게서 글을 배운 것과 관련이 있다. 스승은 빼어난 시인이자 서예가였으나 신분의 한계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데 한이 컸고 그만큼 생각이 자유로웠다. 이런 기풍을 받은 둘은 이상적인 가치관을 갖고 고집스럽게 실천했다. 비록 당시는 양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패배자, 이단아였으나 수백 년 지나 후대인들은 이에 매료되어 기리고 있다. 허균의 ‘문파관작’은 높은 능력을 지닌 사람이 시류보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 좇는 자세를 잘 나타냈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일레라. 내 분수 벼슬과는 벌써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하랴,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라.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


기념관 뒤쪽에는 허난설헌이 태어난 초당동 고택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과 디딜방아가 있는 넓은 크기에 가지런한 뒤뜰 정원이 잘 보존되었다. 하루 묵어가고 싶은 멋스러운 한옥이다. 문밖은 소나무 숲길이 길게 나 있어 여행자의 좋은 산책로가 되었다.



9.1.(목) 맑음


선자령


아내에게 물었다. “선자령에서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았어? 풍경 말고.” 생각밖에 대답이었다. “쉬운 길을 돌아갔던 거? 성황당까지 차로 올랐다면 선자령까지 갔을 텐데.” 처음 가는 곳은 나름 단단히 준비하지만 헤매기 십상이다. 출발 전 며칠 동안 틈틈이 확인했던 선자령이 특히 그랬다. 비록 그때는 놓친 게 많았으나 내려와서는 구석구석 기억이 선명했고 오히려 가지 않던 길까지 알게 되었다. 다음번은 그중에 하나를 골라 정상까지 가볼 생각이다.


선자령은 대관령 북쪽에 있다. 태백산맥 주 능선에 솟은 고개는 옛 지리지에 대관산, 보현산으로 기록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로였던 대관령옛길로 오르는 길이 험하지 않아 트레킹 하기 좋다. 요 며칠 비가 와 맑은 날을 기다렸다.


숙소에서 사십 분 남짓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렸다. 선자령 입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에 넓은 휴게소가 있어 잠시 들렀다. 평일이지만 인접한 양떼목장에 가거나 시원한 바람맞으며 산행을 즐기려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산에서 먹을 간편한 음식을 사 돌아오는 길, 건물 사이 ‘선자령’ 표지판이 보였다. 호기심이 일었으나 내비게이션이 처음부터 알린 좁은 주차장으로 옮겨 힘겹게 차를 세웠다. 정상까지 편도 육 킬로미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시작 지점은 이미 팔백 미터 높은 고도라 큰 부담 없는 오르막이었다. 다만 아이와 아내를 위해 중간쯤 있는 전망대를 목표로 했다. 걸어 올라가던 포장도로를 따라 드문드문 차가 오르내렸다. 한참 차로 더 갈 수 있는 듯했다. 뜨거운 해가 내리쬐어 가장자리 나무 그늘로 붙었다. 도로 아래로 작은 시내와 그 너머 숲길이 있어 폭신한 흙을 밟으려 내려갔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공기, 청량한 풀과 나무 냄새, 빽빽한 나무 사이로 비치는 금빛 햇살이 마치 원시림 같았다. 능선으로 이어지는 윗길은 물론 아래로 나무 오솔길이 놓여있었다. 휴게소에 내려 걸었다면 이리로 올라온다. 첫 번째 돌아온 길.


빽빽한 나무숲이 끝날 때쯤 부산한 사람 소리에 의아했다. 이런 산속에 인기척이라니. 오래되지 않아 나타난 울타리 너머 너른 풀밭에 양이 뛰놀았다. ‘목장 코스’라 이름 붙은 대관령 양떼목장 곁을 지나는 구간이었다. 나무에 매달린 안내 리본을 따라 울창한 소나무와 전나무를 지나쳐 갈림길에 들어섰다. 왼쪽으로 가면 샘터를 거쳐 선자령 정상까지 이어졌다. 그곳까지 가자는 말을 슬쩍 흘렸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반대편 전망대 쪽으로 가는데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국사성황사. 김유신을 모신 성황당은 매년 대관령 산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오늘은 개인을 위해 제를 올리는 듯 치성드리려는 사람 몇몇이 바로 앞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왔다. 등산로 초입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오늘 등산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거다. 두 번째 돌아온 길.


등 뒤로 아내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초리가 느껴졌다. 숲속 나무 계단과 흙 비탈을 지나 콘크리트 길을 만났다. 줄곧 오르막이다. 게다가 머리 위를 가리는 나무가 없어 내리쬐는 햇살이 뜨거웠다. 주저앉은 아이를 업고 가다 서다, 한쪽은 숲길 다른 쪽은 통신탑으로 나뉜 길을 만났다. 근처 전망대를 기대하고 올랐으나 건물만 있을 뿐이었다. 세 번째 돌아온 길. 잠시 서 땀을 식혔다.


좁은 숲길은 양옆으로 종비나무가 하늘을 가리며 자랐다. 처음 맡은 청량한 냄새에 머리와 마음이 상쾌했다. 그리 길지 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이십 분을 걸었다. 드디어 마주친 전망대. 아기자기한 강릉 시내와 경포호수는 물론 동해가 멀리까지 보였다. 양옆으로 안반데기와 오대산까지 모두 우리가 지나친 길이 한자리에 있었다. 불평하던 아이는 마주한 풍경을 받아들이며 즐거워했다. 내려가기 전 세 식구는 구름 없는 맑은 하늘과 함께 선자령을 선명하게 담았다.



길 가 나무를 살펴본 아내가 오디를 본듯하다고 말했다. 높이 있어 손이 닿지 않는 데다 빛이 가려 분명하지 않았으나 똑 닮았다. 달콤한 맛이라 들은 아이는 제주도 산딸기를 떠올리며 스스로 나서 긴 막대를 주워 왔다. 이리저리 휘둘러 땅에 떨어진 열매는 다름 아닌 가문비나무꽃이었다. 새끼손가락 크기에 비슷한 모양이나 솔방울처럼 딱딱하고 거친 표면이 완전히 달랐다. 오디까지 맛 보였다면 아이는 분명 곧 다시 오자 말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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