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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일 제주 협재 일기 프롤로그와 하루

첫 한달살이, 2022.4.25일부터 5.27일까지 제주 일기입니다.

by 준환

프롤로그(아내)


책 읽기는 인생의 고비에서 철든 어른으로 나를 이끌었다. 좋은 책은 멘토와 같았다. 그래서 글쓰기란 넘볼 수 없는 대상이었다. 게다가 노력으로도 할 수 없는 타고난 작가의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남편은 휴직하며 한겨레문화원 글쓰기 수강을 시작했다. 백 일간 수업 끝자락에 우리 가족은 한달살이를 위해 제주도로 출발했다. 일상이 글쓰기의 좋은 주제가 되었기에 남편에게 체류기 쓸 것을 권했다. 그렇게 시작한 남편의 33일간의 글쓰기. 완성을 앞두고 보니 다시 생각해도 훌륭한 제안이었다.


뇌의 기억은 한계가 있다. 반복적인 일상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망각 된다. 나이가 들수록 가속이 붙어 짧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제주 한림의 33일은 아직 하루하루가 생생하다. 중력 센 별에서 긴 한 달을 보내고 온 것처럼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은 한달살이처럼 해야 한다고 지인들에게 설파했다. 여행의 진수를 느낀 것처럼 말한 게 다시 생각하면 창피하다. 하지만 그만큼 나에게 값지고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이 생생한 기억도 왜곡되고 잊힐 거로 생각했는데. 맙소사! 남편의 33일간 기록에 우리 추억이 저장되다니.


우리 가족 여행 에세이는 마치 내가 쓴 것마냥 신이 났다. 완성된 책을 펼쳐 들면 우리가 주인공인 제주에서의 어느 순간이 떠오를 생각에 흐뭇하다.


멋지게 추억을 박제해 준 부지런한 화니.

아빠의 글쓰기 원동력 야니.

둘 다 사랑해.


※ 아내가 쓴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하루 <출발>


오늘부터 한달살이다. 아침까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으나 공항에 도착하니 조금 설렜다. 지난 이 년간 출장으로만 왔을 때는 일정을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려는 마음뿐이었다. 지금은 분주한 식당에서 줄을 서서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다.


그러고 보니 출발 터미널은 기묘한 곳이다. 가만히 앉아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걸 바라만 봐도 흥분된다. 흡사 공연장에 모인 느낌. 이곳에는 모두 같은 목적으로 도착했다. 기대를 한껏 담아 어디로 떠나려 한다는 것. 생기가 최고에 달한 지금 서로에게 활기를 전염시키고 있다. 코로나 거리두기가 풀려 더 그렇게 느껴진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차를 받았다. 지난주 토요일 탁송한 것이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춰 당도했다. 넉넉하게 챙긴 탓에 트렁크는 물론 뒷자리까지 짐이 가득했다. 아이는 편히 앉지 못했으나 크게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시. 열시 출발치고는 많이 늦었다. 주인 할머니에게 몇 가지를 안내받고 짐을 가져와 풀었다. 아내와 아이 둘 다 한 달 살 곳에 만족한 얼굴이다. 정리를 마쳤을 때 배가 고파왔다. 가져간 식료품이 없어 마트에도 들를 겸 읍내로 갔다. 여행지에서 먹는 김밥과 라면은 왜 이리 맛있는지 금세 그릇을 비웠다. 이제 나갈 시간.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던 날씨가 결국 거센 바람과 빗줄기로 변해 걸음을 옮기기 어려웠다. 울상인 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아내. 다행히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로부터 비옷을 빌려 입고 차를 가져와 식구들을 태웠다. 가까운 마트에서 일주 일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 맥주 한 잔과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이제껏 온 것 중 가장 한가로운 여행.

한달살이를 계획한 건 작년 이맘때였다. 몇 년 전 우리 회사에서 OOO민족을 운영하는 OOO형제들의 임원이 강연한 적 있다. 안식월이란 제도가 있고 그동안 직원 열에 여덟은 제주 한달살이를 한다고 했다. 그때 나도 해보고 싶어 버킷리스트에 올렸다. 앞으로 우리 가족 일상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까.


한 달 동안 체류기를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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