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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Jun 11. 2021

측백나무 백柏이 언제부터 잣나무로 쓰이게 되었을까?

백柏, 해송海松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19년 11/12월


학창시절에 나는 백柏을 ‘잣나무 백’자로 배웠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 서문을 쓰면서 인용한 논어의 유명한 구절인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도, 성백효의 <현토완역 논어집주>를 보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가원의 <논어신역>에도, 한상갑 역주의 <삼성판세계사상전집 논어>에도, 이우재의 <논어읽기>에도 마찬가지다. 즉, 내가 읽은 모든 논어 번역서들은 백柏을 잣나무로 번역하고 있으니 아마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잣나무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논어의 이 백柏은 잣나무(Pinus koraiensis Siebold & Zucc)가 아니라 측백나무(Platycladus orientalis (L.) Franco)이다. 대만학자 반부준의 <시경식물도감>이나 <성어식물도감>을 보면 백柏을 측백나무로 설명하고 있다. 의문이 생겼다. 소나무과와 측백나무과는 잎의 모양이 현저하게 다르고, 옛날부터 중국에서 소나무를 송松 자로 쓰고 측백나무를 백柏 자로 썼다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백柏을 소나무과에 속하는 잣나무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좌) 측백나무 열매, 2019. 12. 21 남한산성, (우) 측백나무 구화수, 2019.4.21 성남


얼마 전, 일제강점기 때 간행된 <한일선신옥편漢日鮮新玉篇>(박문서관, 1935)을 만지작거리다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옥편이나 자전 등 문헌을 중심으로 추적해보기로 했다.


-      중국 고대 경전에 나오는 물명을 주석한 책인 <이아爾雅>에는 “백栢은 국椈이다 [栢 椈]”로 나오는데, 국椈을 민중서림 <한한대자전>에서 찾아보면 ‘측백나무국’으로 나온다. 이아에서는 이 글자를 측백나무로 본 것이다.


-      조선 중기에 간행된 <시경언해>에서는 “汎범한 뎌 栢백舟쥬ㅣ여 [汎彼栢舟]”라고 해석하여 우리말 훈을 달지 않았다. 논어언해에서도, “歲셰ㅣ寒한 한 然연後후 에 松숑栢백의 後후에 彫됴 하난 줄을 아나니라.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로 해석하여 우리말 훈을 달지 않았다.


-      그러나, 1527년 편찬된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는 “백栢은 ‘즉백 백’이다. 속칭 편송(납작한 소나무)이다. [栢 즉백 백 俗呼匾松]”으로 나온다. 최세진은 측백나무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      (1613년에 초간본이 간행된 <동의보감 탕액편>에는 ‘백실栢實’의 한글 이름으로 ‘측백나모 여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허준 선생도 백栢을 측백나무로 이해했다.)


-      정조 시대인 1796년 경에 편찬된 <전운옥편全韻玉篇>에는 “백柏은 측백나무이다. 나무는 다 양지를 좇는데, 백柏은 음지를 향하고 서쪽을 가리킨다. 귀정鬼廷이라고도 한다.”*로 나온다. 귀정鬼廷이라고 한 이유를 이해하자면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나오는 고사 하나를 알아야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나라 목공穆公 때에 어떤 사람이 땅을 파서 양羊과 비슷한 동물을 잡았는데, 장차 진상하려고 했다. 길을 가다가 동자童子 둘을 만났는데, ‘이 동물의 이름은 온(蝹 혹은 媼)입니다. 항상 땅 속에 있으면서 죽은 사람의 뇌를 먹지요. 만약 이 동물을 죽이자면 동남쪽으로 난 측백나무(柏) 가지를 그 머리에 꽂으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무덤에 모두 측백나무를 심게 되었다. 또 백柏을 귀정鬼廷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운옥편에서도 백柏을 측백나무로 본 것이 분명하다. 백栢은 백柏의 속자이다.


-      1820년대 류희(柳僖 1773~1837)가 편찬한 <물명고物名考>에는 “백柏, 잎은 기울어져서 서쪽을 향한다. 옛날에는 백白을 따랐지만 드디어 백百을 잘못 따르게 되었다. 백柏에는 네 종류가 있으나, 백柏 한 글자만 쓰면 측백側柏이다. 즉백 = 측백側柏, 즙백汁柏, 국편송椈扁松.”*** 그러므로 1820년대 류희는 분명히 이 글자를 측백나무로 주석을 달고 있다.


-      <광재물보廣才物譜>에는, “백柏, 측백. 모든 나무는 모두 양지를 향하는데 柏만 서쪽을 가리킨다. 열매 모양은 작은 방울 같다. 서리가 내린   쪽으로 벌어진다. 씨앗 크기는 보리 낟알과 같다. 향기가 사랑할 만하다.”****라고 하여 잣나무가 아닌 측백나무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안동 구리 측백나무 자생지의 측백나무, 2018.4.8 안동
안동 구리 측백나무 자생지, 2018. 4. 8 - 안내판의 Chinese juniper(=향나무)는 잘못이다.  측백나무의 영명은 Oriental arborvitae이다.

이상에서 보면, 조선시대에는 백柏을 분명하게 측백나무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송松과 같이 쓸 때엔 반드시, 편송匾松이나 국편송椈扁松, 편송扁松이라고 하여, 측백나무의 한쪽으로 기울어져 납작한 잎 모양을 표현했다. 대신 잣나무를 나타낼 때에는 오엽송五葉松이나 해송海松을 썼다. 특히, 1446년에 간행된 <훈민정음해례> 용자례用字例에도 “잣爲海松’, 즉 ‘잣’은 해송海松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각종 문헌에서 백柏은 측백나무이고, 잣나무는 해송海松이라고 했지만, 조선 후기에 백柏을 ‘잣나무’로 혼용해서 썼던 모양이다. 박상진의 <우리나무의세계2>를 보면, 1783년경에 간행된 <왜어유해倭語類解>에서는 백柏을 잣나무라 했다고 한다. 정약용若鏞(1762~1836) 선생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백柏은 측백側柏이다. 즙백汁柏이라고도 한다. <비아埤雅>에서는, ‘백柏에 여러 종류가 있고, 잎이 작고 기울어져 자라는 것이 측백이다’라고 했다. <본초>에서 일컬은 측엽자側葉子가 이것이다. 그 씨앗은 백자인柏子仁이라고 한다. 이것은 날마다 쓰고 있어서 쉽사리 알 수 있는 물건이다. 해송海松은 유송油松이다. 과송果松, 오렵송五鬣松이라고도 한다. [또한, 오립송五粒松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동국여지승람> 산골 군郡의 토산土產에 모두 해송자海松子가 실려 있고, 또한 날마다 쓰고 있어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민간에서 홀연히 과송果松을 백柏이라고 부른다. 산골 군郡에서 과송자果松子(잣)을 누구에게 바칠 때, 문득 ‘백자柏子 몇 말이다’라고 하고, 어린이를 가르칠 때 ‘백柏은 과송果松[방언은 ‘잔戔’ 자字를 꺽어 읽는 소리]이다’라고 말해준다.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정약용 선생이, 백柏을 잣나무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힌 후에도 백柏에 대해서는 혼동이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구한말, 일제강점기 이후 옥편이나 자전을 살펴보자.


-      1909년부터 출판된 지석영池錫永의 <자전석요字典釋要>에는 “柏 백, 측백나무 국椈이다. 측백나무백.”으로 분명하게 측백나무임을 밝히고 있다. 이 <자전석요>는 1920년대까지 증보되면서 여러 번 출판되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애용한 자전이라고 한다.


-      1935년 경 경성의 박문서관에서 출판한 <한일선신옥편漢日鮮新玉篇>을 보면, “백柏, 잣나무 (백). 나무가 소나무 같고 늘 푸르다. 그 열매는 끝이 크고 맛이 좋다. [柏 잣나무 (백) 樹似松常綠 其實梢大味美].”로 나온다, 드디어 잣나무로 설명하는 옥편이 나온 것이다.


-      1950년에 초판이 발행된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에는, “백엽다柏葉茶 : 동쪽으로 벋은 잣나무의 잎을 따서 말렸다가 달인 차”, “백엽주柏葉酒 : 측백나무 잎을 담갔다가 건져낸 술”, “백자柏子 : 잣”, “백자당柏子糖 : 잣엿”, “백자말柏子末 : 잣가루”, “백자인柏子仁 : 한의-측백나무 열매의 씨. … 약으로 씀” 등으로 용례가 혼용되어 있다. 흥미 있는 것은, 1957년 간행된 <우리말큰사전>의 잣나무 항목에서는 “솔과에 딸린 상록 교목. … (과송=果松, 송자송=松子松, 오렵송=五鬣松, 오립송=五粒松, 오렵송=五葉松, 유송=油松, 해송=海松, Pinus koraiensis sieb zucc.)”로 설명하여 한자어표기에 백柏을 사용하지 않은 점이다. 한편 측백나무항목 설명에는 한자어표기로 측백側柏을 쓰고 있다.


-      1963년 간행된 동아출판사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에는, “柏백 나무이름[扁-側-漢羅-竹-]”으로 설명하지만, 용례는 “[柏子仁 백자인] 측백나무 열매의 씨”를 제외하곤 모두 “[柏葉 백엽] 잣나무 잎, [柏子 백자] 잣, [柏子末 백자말] 잣가루…” 등 잣나무로 해설하고 있다.


-      1966년 초판이 발행된 후 1991년에 26쇄까지 발행한 대표적인 민중서관/민중서림의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에서는, “柏 (1)나무이름백 측백나무 곧 側-과, 노송나무 곧 扁-의 총칭. (2)(韓)잣나무백, 잣백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 또 그 열매. –葉茶.”로 되어 있다. 즉, 우리나라(韓)에서는 잣나무라고 설명한 것이다.


-      1990년 발행된 이상사의 <한한최신실용자전漢韓最新實用字典>에는, “柏백 ㅣ松 잣백 椈也칙백나무백”으로 되어 있어서 잣나무를 측백나무보다 앞세우고 있다.


잣나무 열매, 2018. 7. 22 감악산


즉, <자전석요>까지는 명확하게 백柏을 측백나무로 설명하다가, 일제감점기가 오래 지속된 후인 1930년대 한일선신옥편에서 잣나무로만 설명한 후 거의 모든 사전에서 잣나무를 우선해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왜어유해>의 영향으로 시작되어 혼동을 야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왜어유해>는 일본어 역관들이 일본인에게 물어서 정리한 일본어 어휘집인데, 정작 일본에서는 당시에 백柏을 ‘잣나무’로 보지는 않은 것 같다. 2008년 6월 일본에서 간행된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 백柏에 대해 중국에서는 측백나무(Platycladus orientalis)이지만 일본에서는 떡갈나무(Quercus dentata)를 지칭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에서만 백柏을 잣나무로 볼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양주동 선생이 1948년에 편찬한 <국문학정화>를 뒤적이다가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바로 두시언해를 인용하는 부분에서 두보의 시 ‘고백행古栢行’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孔明廟前有老栢             孔明ㅅ 廟ㅅ알패 늘근 잣남기 잇나니

柯如靑銅根如石             가지난 프른 구리쇠 갇고 불휘는 돌 갇도다


원본 두시언해를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두시언해 초간본은 1481년에 간행되었는데, 이때부터 ‘노백老栢’이 ‘늘군 잣남기’로 번역되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백栢을 ‘잣나무’로 본 것은 두시언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시언해는 그 후 여러 차례 중간되면서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우리나라 일각에서 백柏을 잣나무로 이해하게 된 데에는 두시언해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또한 1937년에 간행된 아동 교육서인 <계몽편언해啓蒙篇諺解>도 “衆즁木목之지中중에 松송栢백이最최貴귀니라”를 “뭇나무에 가온대에 솔과 쟛나무가 가장 귀한 거시니라”로 훈을 달아서, 아이들이 백栢을 잣나무로 배우도록 하여 이러한 이해를 정착시켰다.


측백나무, 2021.6.5 강화도 -  이건창李建昌(1852~1898) 생가에 있는 수령 350여년의 측백나무이다. 그는 이 나무를 보며 송백지후조를 떠올렸을 것이다.


<중국식물지>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잣나무는 중국에서는 동북부 장백산 지대 및 길림성에만 자란다고 한다. 반면 측백나무는 중국 서북부 내몽고 남부 지방부터 호남성, 광동성 북부 지방까지 광범위하게 자생한다. 즉, 잣나무가 공자가 주로 활동한 지역에는 자라지 않는 점으로 보아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백柏은 잣나무가 아닌 측백나무가 분명하다. 그리고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백柏은 대개 측백나무일 것이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릴 때에도 그림의 간략한 표현만으로 나무 종류를 정확히 판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그렸을 것이다. 그림 속에서 고목이 있는 오른쪽 2그루와 왼쪽 2그루가 표현 방법이 조금 다른데, 오른쪽은 소나무, 왼쪽은 측백나무가 아닐까?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일부 혼용해서 썼을 것이므로, 문맥에 따라 정확히 번역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대단히 어렵다. 예를 들면, 무덤 주위를 둘러싼 송백松柏이라고 했을 때 고전의 문맥상으로는 소나무와 측백나무임에 틀림없지만 글을 쓴 당사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생각하고 썼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18년 5월 작성 원고,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통권 183호, 2019년 11/12월, pp.70~73. (2021.6월 보완)>


*柏 백 椈也 木皆屬陽 ㅣ向陰指西又鬼廷 - 전운옥편全韻玉篇

**秦穆公時 有人掘地 得物若羊 將獻之 道逢二童子謂曰 此名爲蝹 常在地中 食死人腦 若欲殺之 以柏東南枝捶其首 由是墓皆植柏 又曰柏爲鬼廷 - 續博物志

***柏 葉側向西 古從白 遂誤從百 柏有四種 而單言柏則側柏也. 즉백 = 側柏, 汁柏, 椈扁松 - 물명고物名考

****柏 측백. 萬木皆向陽而柏獨指西 梂狀如小鈴 霜後四裂 子大如麥粒 芬香可愛 = 椈, 側柏, 扁松 - 광재물보廣才物譜

*****柏者 側柏也 汁柏也 埤雅云柏有數種 其葉扁而側生者 謂之側柏 本草所稱側葉子是也其仁曰柏子仁 此日用易知之物也 海松者 油松也 果松也 五鬣松也 [亦名五粒松] 吾東輿地志山郡土產 咸載海松子 亦日用易知之物也 今俗忽以果松呼之爲柏 山郡以果松子饋人 輒云柏子幾斗 其訓蒙穉 訓柏曰果松 [方言如戔字摺聲] 豈不誤哉 - 아언각비

+표지사진 - 수령 350여년의 측백나무 고목, 강화도 이건창 생가. 20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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