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경인 Mar 26. 2021

깨소금같이 고소한 개암, 고운님을 상징하는 개암나무

진榛

겨울이 채 가시기 전 이른 봄 숲 속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보다 먼저 봄을 알려주는 나무들이 있다. 꼬리 모양의 미상화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라 보통 꽃으로 인식하지 않고 지나치지만 오리나무와 개암나무가 그들이다. 오리나무는 큰 키로 자라는 나무라서 우리 눈 높이에서는 꽃을 보기 어렵지만, 관목인 개암나무의 노란 수꽃차례는 아직 잎이 나지 않아 앙상한 가지만 있는 이른 봄 숲 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실로 봄의 전령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의 산골 마을에서는 개암나무를 ‘깨금나무’라고 불렀다. 여름철 아버지가 거름 용으로 외양간에 넣을 풀을 한 짐 해오면, 나는 풀 속에 깨금이 있는지 찾아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풀’이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에 밭 가 낮은 산자락의 작은 관목 떨기나 풀을 베어서 적당히 자른 후 외양간 바닥에 깔았는데, 이것을 그냥 ‘풀’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가끔 ‘깨금’ 몇 알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기도 했는데, 이 깨금을 까서 씹으면 깨소금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고소했다. 


개암나무 열매, 2014.7.5 천마산


흥미롭게도, 이 개암나무는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가사, 사미인곡思美人曲의 그 미인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임금이나 현자를 상징하는 이 ‘미인’은 <시경> 패풍邶風의 시, ‘익숙하게 춤을 (簡兮)’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 시에 ‘진榛’과 ‘령苓’이 나오는데, <중국식물지>나 <시경식물도감>에 의하면 진榛은 개암나무(Corylus heterophylla Fisch. Ex Trautv.)이고 령苓은 감초(Glycyrrhiza uralensis Fisher)이다. 이 시로부터 ‘진령榛苓’은 미인의 상징이 되었다.


簡兮簡兮        익숙하고도 익숙하게, 

方將萬舞        막 춤을 추려 하네.

日之方中        해가 하늘가운데 오른

在前上處        궁전 앞뜰에 모였네.

左手執籥        왼손엔 피리 쥐고, 

右手秉翟        오른손엔 꿩 깃을 잡았네.

赫如渥赭        얼굴 붉게 상기되자 

公言錫爵        임금께서 술잔 내리시네.


山有榛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隰有苓             들판엔 감초가 있네. 

云誰之思         누구를 생각하나, 

西方美人         서방의 미인이로다.

彼美人兮         저 미인이시여 

西方之人兮     서방에 계신 분이로다.


개암나무 꽃차례, 2020.3.14 천마산 - 붉은 점 같은 암꽃차례와 노오란 꼬리 모양의 수꽃차례가 모두 보인다.


이렇게 미인美人, 즉 고운님의 상징이 된 고전 속의 진榛에 대해서 우리는 대체로 혼동 없이 ‘개암나무’로 이해하고 있다. 문헌을 살펴보면, <훈몽자회>에서 “榛 개옴진”이라고 했고, <동의보감 탕액편>에서는 진자榛子를 ‘가얌’이라고 했다. <물명고>도 “榛 개얌”, <자전석요>는 “榛 가얌진”, <한선문신옥편>에도 “榛 가얌진”으로 나오고, 현대의 <한한대자전>도 “개암나무 진”으로 설명한다. ‘개옴’과 ‘가얌’, ‘개얌’은 모두 개암의 고어이므로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진榛을 한결같이 개암나무로 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아마도 <본초강목>에서 ‘개암(榛子)’을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신라의 개암은 희고 토실토실하여 가장 좋다’라고 했다”*고 설명했듯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개암이 예로부터 약재로 사용되었으며, 양품으로 중국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참개암나무 열매, 2019.7.14 괴산


우리나라에는 개암나무 뿐 아니라 참개암나무(Corylus sieboldiana Blume var. sieboldiana)와 물개암나무(Corylus sieboldiana Blume var. mandshurica [Maxim.] C. K. Schneid.)도 자생하고 있다. 하지만 참개암나무나 물개암나무 열매 표면에는 가시 같은 가는 털이 밀생하고 손으로 만지면 그 자잘한 가시가 박히므로 조심해야 하는데, 굳이 가시가 있는 이 참개암나무나 물개암나무 열매를 식용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오래 전부터 나는 개암나무 수꽃차례를 보고 봄이 왔음을 느꼈지만, 암꽃은 몇 해 전 봄 남양주 천마산에서 처음 관찰했다. 십여 가닥 붉은 실을 모아놓은 것 같은 암꽃차례는 앙증맞기 그지없었는데, 이 암꽃이 수정되어 고소한 개암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조차 했다. 이 개암나무 암꽃은 ‘고운님(美人)’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어촌漁村 심언광沈彥光(1487~1540)이 냉엄한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후, 만년에 쓴 시 ‘가을 시름(秋懷)’을 감상한다. 이 시에서 개암나무(榛)와 감초(苓)는 미인美人, 즉 임금을 상징하고 있다.


개암나무 암꽃차례, 2017.4.1 천마산


秋雨蕭蕭草木萎             가을 비 소슬하고 초목은 시드는데,

夜軒幽坐不眠時             깊은 밤 마루에 앉아 잠 못 이루고

百年壯志書生老             백년토록 장한 뜻 지닌 서생도 늙어

九月高風遠客悲             구월의 높은 바람에 나그네는 슬프다.

宋玉淸愁深似海             송옥宋玉**의 시름은 바다 같이 깊고

潘郞衰鬢白如絲             반악潘岳의 귀밑머리는 실처럼 희구나

美人杳杳西方隔             고운 님은 아득히 먼 서쪽에 계시니

山濕榛苓有所思             산과 들엔 개암나무와 감초, 그리움만 깊어지네


<끝  2020.5.5>


*大明曰 新羅榛子 肥白最良  - 本草綱目 卷三十, 榛子

**송옥宋玉(기원전298전후~기원전222)은 굴원屈原의 뒤를 잇는 초사문학의 작가로 ‘구변九辯’과 ‘招魂’을 지었다. 반악潘岳은 진晉나라의 문장가로, 그가 지은 ‘추흥부秋興賦’에 “내 나이 서른두 살에 처음으로 흰머리를 보았다”라고 했다. 

% 시경의 시는 허경진,이가원 <시경> 번역을 참조했다.

+표지사진, 개암나무 수꽃차례, 2020.3.14 천마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