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도나무 하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가 흥얼거려지지만, 내가 자란 경북의 산골마을에선 앵도나무를 보기 어려웠다. 개나리도 흔치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 나무들은 누군가 심어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산골의 봄은 생강나무 노란 꽃과 참꽃이라고 부르던 진달래 분홍색 꽃이 초봄을 장식한다. 그런 다음 산에는 벚꽃이 피었다. 일찍 잎이 나오는 나무들이 초록을 살며시 내 밀 무렵, 벚나무들은 가지마다 가득히 꽃을 피워 연두색 산록의 이곳 저곳을 희게 장식했다. 이 때가 아마 봄 풍경의 절정일 것이다. 이제 고향의 봄을 추억하면서, 앵도나무와 벚나무와 관련된 고전 속의 한자에 대해 살펴본다.
고향 뒷 산의 봄 풍경, 2020.4.26 안동
중국이 원산지인 앵도나무는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이전에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국에 널리 식재하고 있어서 인가 주변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앵도(앵두)는 미인의 입술을 상징했는데, 우선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황주 거리에서 앵도 가지를 보다 (黃州衙路 見櫻桃枝)”라는 시를 따사로운 봄 날을 떠올리며 감상해보자.
櫻唇桃頰艶新粧 앵도 입술에 복사 빰, 곱게 새로 꾸미니
一朶春光澹欲香 한 떨기 봄 빛이 향기롭게 스미네
嬌語嬌情非一態 아리따운 말과 은근한 정, 서로 다른 모양으로
相逢幾斷丈夫膓 만날 때마다 얼마나 장부의 애를 태웠나
앵도나무 꽃, 2014.3.30 성남
이 시의 제목 앵도櫻桃가 말 그대로 앵도인지, 아니면 아리따운 여인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이 시에서 앵櫻은 앵도나무(Prunus tomentosa Thunb.)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훈몽자회>에서 앵櫻을 “이사랏앵, 즉卽 앵도櫻桃 일명一名 함도含桃”로 설명했고, <물명고>나 <광재물보>에서도 앵도櫻桃를 “이스랏”으로 설명했다. ‘이스랏’ 혹은 ‘이사랏’은 앵도의 우리말 고어이다. 그 후, <자전석요>, <한선문신옥편>도 앵櫻을 앵도로 설명했고, 현대의 <한한대자전> 등도 앵도나무로 해석했기 때문에, 대부분 고전 번역에서 이 글자는 바르게 앵도로 번역하고 있다. <중국식물지>도 앵도나무를 모앵도毛櫻桃로 기재하고 있다.
잔털벚나무, 2021.4.4 청계산
하지만, 산앵山櫻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대부분 산앵山櫻을 산에 자라는 앵두나무로 생각하고 “산 앵두”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정약용 선생은 <아언각비>에서, “내奈는 빈파蘋婆(능금나무)인데, 그 글자의 뜻(訓)을 산앵山櫻이라고 한다”라고 하고, 이 문장에 대해, “방언으로 내奈는 사과沙果이다. 산앵山櫻은 ‘벗’인데, 와전되어 ‘멋’이 되었다”*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즉, 산앵山櫻의 ‘벗’이 와전된 ‘멋’으로 뜻을 삼아서 내奈를 ‘멋 내’라고 읽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 때 정약용 선생은 산앵山櫻을 벚나무로 본 것으로 짐작된다.
벚나무 꽃, 2020.4.18 남한산성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령국지蜻蛉國志, 즉 일본에 대해 기술한 글에, “왜인의 풍속은 앵화櫻花를 중하게 여기는데 앵櫻은 산앵山櫻이니, 곧 화樺이다. 나무 크기는 두세 길이고, 꽃은 흰색인데 자색 꽃도 있으며, 홑 꽃잎과 겹 꽃잎이 있다.”**가 나온다. 자작나무를 뜻하는 화樺는 일부 문인들이 벚나무로 이해하기도 한 글자인데, 이덕무는 벚나무로 본 듯하다. 이 글에서 앵화櫻花는 ‘벗꽃’, 산앵山櫻은 ‘벚나무’ 혹은 ‘산벚나무’임이 분명하다. (문맥에 따라서는 앵화櫻花가 앵도나무 꽃을 가리킬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중국식물지>는, 벚나무(Prunus serrulata Lindl, Cerasus serrulata)를 산앵화山櫻花라고 하고, 왕벚나무(Cerasus yedoensis)를 동경앵화東京櫻花라고 한다.
올벚나무 꽃, 2019.4.6 해남
한편 <물명고>에 흑앵도黑櫻桃가 나오는데, ‘벋’으로 설명하면서, “인가의 앵도도 색이 검은 것이 한 종 있지만, 산에 나는 것은 반드시 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전석요>와 <한선문신옥편>에서 흑앵黑櫻을 ‘벗’으로 설명한다. 조선후기의 문신 이서우(李瑞雨 1633~?)가 쓴 “산앵설山櫻說”이라는 글을 봤는데, 여기에서도 산앵山櫻은 벚나무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다. 조금 길지만 재미있는 글이라 전체를 번역해본다.
“앵도나무 잎과 앵두 꽃 비슷한데 산에 있는 것을 산앵山櫻(벚나무, 산벚나무)이라고 한다. 나무가 크고 껍질이 매끄러운 것이 다른 점이다. 그 열매 또한 앵두와 나란히 익는다. 산골 백성이 시장에 내다 팔면 앵두보다 두 배 가격을 받는다. 나는 그것이 심히 의심스러워 백성에게, “앵두는 그 크기가 탄알 같은데, 산뜻한 붉은색으로 단사丹砂를 연하게 입힌 것 같다. 버찌(山櫻, 벚나무 열매)는 까마중(용규龍葵, Solanum nigrum L.) 같이 작고 쥐 눈처럼 돌출해 있으며, 짙은 송연묵 색이다. 어떤 것이 더 색이 좋은가?”라고 물었다. “앵두 색이 매우 빛나니, 버찌가 어찌 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앵두는 과육이 두텁고 껍질이 연한데다가 신맛이 적고 매우 달아서 보배롭고 기름진 옥액玉液이라 목구멍으로 잘 넘어간다. 버찌는 씨가 크고 과육은 얇고, 조금 달다가 오래 맵고, 검은 먹물 같은 즙이 흘러 이빨과 입술에 물이 든다. 어떤 것이 더 맛있는가”라고 물었다. “앵두 맛이 매우 좋으니, 버찌가 어찌 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앵두는 많이 먹어도 해가 없고, 속을 고르게 하고 비위를 돕는다. 어린 아이가 오래 먹으면 허약한 간肝을 고칠 수 있다. 버찌는 조금 씹으면 가슴이 결리고, 과하게 먹으면 배가 답답해지는데, 굶주린 사람이 조절하지 못하면 가끔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 공이 무엇이 더 큰가?”라고 물었다. “앵두의 공이 매우 뛰어나니, 버찌가 어찌 견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앵도, 2021.6.5 강화도 전등사
“그렇다면, 버찌의 색이며 맛이며 공이 모두 앵두보다 훨씬 아래인데도, 앵두보다 배나 더 받고 파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앵두나무는 집집마다 심어 가꾸고 옮겨 심으면 더욱 잘 자랍니다. 키 작은 나무의 낮은 가지에 빽빽하게 열리므로 잠시만 따도 광주리에 가득합니다. 버찌는 깊은 숲 후미진 골짜기에 큰 나무 위 높은 곳에 있어서 오르기 어려운데다가, 긴 가지에 멀리 있어서 오래도록 따야 한 됫박 채웁니다. 무릇 물정物情이란 것은, 적으면 귀하게 여기고 많으면 천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버찌가 앵두보다 두 배 가격이 나가는 까닭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형세가 대개 그러하였다. 아, 어찌 버찌만 그렇겠는가! 사람에게 비유한다면, 얼굴보다 더 이쁘게 꾸미면 부끄러운 것이고(色於貌則赧), 말에 재미를 더하면 거짓말이 되고(味於言則誕), 일보다 공을 더 가지면 배반이 된다(功於事則畔). 그러나, 화려하게 치장하고 긴 옷자락을 끌면서 좋은 가마를 타고 다니는 이들의**** 값이 훌륭한 선비나 뛰어난 인재보다 큰데, 항상 두 배 내지 다섯 배나 된다. 어찌 멀리서 왔으므로 얻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어찌 버찌만 그렇겠는가! 나는 일찍이 말했다. “좋고 나쁜 것은 하늘에 달렸지만, 귀천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버찌에서 거듭 증명되는구나”.*****
왕벚나무 익어가는 버찌, 2019.6.9 양평
무언가 글쓴이의 한탄이 서려있는 듯하다. 버찌가 앵두보다 비싼 것은 약용이든 식용이든 과시용이든 누군가 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버찌가 구황식물로 사용된 정황을 나타내는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 시, ‘시골 삶에 대해 (鄕曲卽事)’의 일부를 읽어본다.
旱氣忡忡遍四方 온 사방이 가뭄이라 걱정스러운데
稻畦龜坼已無秧 논 이랑이 쩍쩍 갈라지니 모도 다 없어졌구나
飢童往伺山櫻黑 배고픈 아이는 버찌가 검게 익었는지 살피러 가고
嬾婦來看小麥黃 게으른 아낙은 밀이 누렇게 되었는지 보러 오는구나.
벚나무 설익은 버찌, 2020.6.13 화악산
참고로, 현대의 식물분류에서 말하는 산앵도나무(Vaccinium hirtum Thunb.)는 진달래과에 속하는 나무로 열매가 앵두와 닮긴 했지만 장미과에 속하는 벚나무나 앵도나무와는 관계가 멀다. 이스라지(Prunus japonica Thunb.)가 앵두의 고어인 ‘이스랏’을 계승하고 있고 낙엽관목으로 열매가 앵두와 유사하므로 고전의 산앵山櫻이 이 나무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스라지는 고전에서 욱리郁李나 상체常棣로 쓴다.
****예장曳長: (옷자락을) 길게 끌고 다닌다는 뜻으로, 권세가의 식객이 되어 출세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추양鄒陽이 오왕吳王에게 보낸 글 가운데 “내가 고루한 나의 마음을 꾸미려고만 들었다면, 어떤 왕의 궁문인들 나의 긴 옷자락을 끌고 다닐 수가 없었겠는가. 飾固陋之心 則何王之門 不可曳長裾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漢書 鄒陽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