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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Dec 24. 2022

항주 선비들과 담헌의 건정동필담 속 안주거리, 매당梅糖

소귀나무 열매, 양매楊梅,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3년 5/6월


“대마도 종정성宗貞盛이 야로구也老仇를 보내어 목부용木芙蓉 3그루와 양매목楊梅木 1그루를 바치므로, 상림원上林園에 심으라 명하였다.”*


몇 달 전에 제주도에서 부용을 감상한 후 찾아본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1447년) 5월 19일 기사이다. 목부용은 지금은 제주도에도 자라는 부용(Hibiscus mutabilis L.)일 것인데, 양매楊梅가 무엇일까 조사하다가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 ‘건정동필담乾凈衕筆談’에 양매가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대학시절에 <열하일기>와 함께 <담헌서>를 헌책방에서 사 두었던 기억이 나서, 오랫동안 서가 구석에서 잠들고 있던 책을 꺼내어 ‘건정동필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었다. 양매가 소개된 부분을 포함하여 글 내용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책을 산 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건정동필담’ 전체를 완독하게 된 것이니, 이 귀한 글을 읽지도 않고 오랜 세월 버려둔 것이 담헌 선생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건정동필담은 소위 북학파의 맏형으로 일컬어지는 담헌 홍대용이, 1765년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는데, 당시 북경에서 고대하던 중국 문사들을 만나 건정동에서 1766년 2월 3일부터 2월 29일까지 짧지만 극적으로 사귄 기록이다. 홍대용이 교유한 중국 문사는 당시 회시會試를 보기 위해 절강浙江 항주杭州에서 상경한 엄성嚴誠(1732~1767), 반정균潘庭筠(1742~?), 육비陸飛이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이국 남자들이 우연히 만나서 하룻밤 사이에 천하에 둘도 없는 지기가 되고, 흉금을 터놓고 온갖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눌 수 있단 말인가? 홍대용의 경우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말이다. 


소귀나무 열매, 양매 (김태영 사진)


이렇듯 아름다운 선비들의 사귐에는 술도 필요하지만 안주거리도 필요한 법이다. 양매는 바로 항주 선비들이 안주로 내놓은 먹거리로, 처음 만난 지 10일이 지난 2월 12일자 필담에 등장한다. 


또 병과餠果를 내왔다. 내가 귤병橘餠 먹기를 좋아한다고 난공蘭公(반정균潘庭筠의 자字)은 자루 속에서 쉬지 않고 꺼내 놓는다. 매당梅糖이 있었다. 내가 “이것은 겨울에 꽃이 피는 매화 열매입니까?”라고 물었다. 역암力闇(엄성嚴誠의 자)이, “이것은 양매楊梅 입니다. 그 색깔은 붉고 고우며, 아주 큰 것은 한 치나 되는 것도 있고 5월에 납니다”라고 대답했다. 다 먹고 나자 국화차 한 잔씩을 내어 놓았다. 꽃잎은 감국甘菊과 흡사하고, 마시니 자못 국화 향기가 풍겼다.**



이렇게 홍대용이 1766년 2월 북경의 건정동에서 술 대신 먹었던 매당梅糖이 바로 대마도주가 세종에게 헌상했던 그 양매楊梅 나무의 열매로 만든 것이다. <중약대사전>와 <중국식물지>를 참조하면 양매楊梅는 Myrica rubra [Lour.] Sieb. et Zucc.로 우리가 현재 소귀나무로 부르는 나무이다. 일본 문헌인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도 양매는 Myrica rubra를 의미한다. <본초강목>에서 이시진李時珍은, “양매수楊梅樹 잎은 용안龍眼 및 자서향紫瑞香 비슷하고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다. 2월에 꽃이 피고 꾸지나무(닥나무) 열매와 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5월에 익는다. 붉은 색, 흰 색, 자주 색의 세 종류가 있다. 붉은 색이 흰 색 보다 좋고, 자주색이 붉은 색보다 좋다. 알맹이는 크고 핵은 자잘하다. 염장鹽藏해도 좋고, 꿀에 절여 엿으로 만들어도 모두 좋다.”***라고 소귀나무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담헌이 맛 본 매당梅糖은 소귀나무 열매를 꿀에 절여 엿으로 만든 것일 터이다.


(좌) 양매 그림 - 삼재도회. (우) 어린 소귀나무, 2020.11.14 서귀포
닥나무 열매, 2022.7.1 안양 수리산


소귀나무 열매를 꾸지나무(닥나무) 열매와 비슷하다고 한 설명은 상당히 그럴듯하다. 이 소귀나무는 <한국의 나무>에 따르면 제주도 서귀포 일대의 하천 부근에 드물게 자라는 희귀한 나무로, 열매는 식용 가능하다. 상록 교목이며 높이 5~10(~25)미터까지 자란다. 암수딴그루이며, 3~4월에 잎겨드랑이에서 꽃차례가 나온다. 열매는 1.5~2cm의 구형이며, 6~7월에 짙은 적색으로 익는다. 표면에 즙이 많은 입상 돌기가 있다.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에 ‘태감太監 강옥姜玉이 대궐 주방의 진귀한 과실을 보내오다’라는 시제詩題로 양매楊梅를 읊은 시가 있다.


珍重楊家果     보배로다! 양씨 집의 과실은,

生平所未觀     평생토록 보지 못한 것일세

御廚分異物     대궐 주방에서 진기한 물건 보내주어

旅館慰儒酸     여관의 빈궁한 선비를 위로하네

鶴頂光猶熳     학정의 빛깔은 아직도 찬란하고

龍睛血未乾     용정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네

若爲懷美顆     어떻게 이 아름다운 과실을 품속에 감췄다가

竣事薦金盤     일 마치고 돌아가 쟁반에 담아 드릴까 


이 시를 읽어보면, 성현이 아마도 1400년대 후반에 처음으로 본 양매 열매가 아주 싱싱한 상태이다. 학정매鶴頂梅와 용정龍睛은 양매의 이명이라고 한다. 당시 대궐에서 어떻게 싱싱한 소귀나무 열매를 성현成俔에게 하사할 수 있었을까? 대마도에서 진상한 것일까? 아니면 1447년에 상림원에 심었던 양매목에 열린 것일까? 이렇게 양매는 조선시대에 쉽사리 맛볼 수 없는 귀한 과일인데, 17세기 이후 일본으로 사행 갔던 이들은 맛볼 수 있었다. 1643년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왔던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이 읊은 양매楊梅를 감상해본다.


玉盤楊梅李白詩     이백 시에 나오는 옥반의 양매를

今朝見之東海湄     오늘 아침 동해 가에서 보았네

幷與盧橘五月熟     노귤과 함께 오월에 익는다는데****

絶勝蒲萄萬口知     누구나 아는 포도보다 훨씬 맛있네

渴肺賴爾吐生氣     네 덕분에 목마른 가슴에도 생기가 돌아

老夫於此伸愁眉     늙은이 이제야 찡그린 눈살을 펴네

從來異域侈嘉果     이국 땅에 예로부터 좋은 과일 많다 해도

焉有人才當獸皮     수피獸皮에 해당하는 인재야 어찌 있으랴?

소귀나무 수피, 2020.11.14 서귀포

이렇게 일본 사행使行 길에서나 맛 볼 수 있는 귀한 먹거리였지만,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주도 토산물에는 양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멀꿀 등을 기록한 김정金淨(1461~1521)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도 양매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800년대 저술들인 <물명고>나 <명물기략>에도 양매楊梅가 수록되어 있으나, 그 설명을 보면 앞에서 인용한 <본초강목>의 설명과 유사하며 한글 이름이나 우리나라에서 자생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제주도에 양매가 있는 것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다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 Myrica rubra Siebold et Zuccarini가 한자명 양매楊梅와 함께 소귀나무(속나무)로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식물 분포 연구를 통해 발견된 것으로 보이며, 정태현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소귀나무의 분포지로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러한 식물분포 연구를 반영하여 1950년 <한글학회지은 큰사전>은 소귀나무를 “제주도, 완도(莞島) 등 더운 곳에 저절로 나는데, … 목재는 여러 가지로 쓰고 과실을 먹으며, 나무 껍질은 갈색의 염료로 씀. 양매楊梅. (준말)속나무”로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조선시대 조정에서 제주도에 양매가 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의 진상품인 귤에 대해 정약용이 읊은 ‘공귤송貢橘頌’에는 감귤을 진상하느라 힘겨워하는 제주도민의 애환이 담겨있다. 이런 제주도 백성들에게 양매까지 진상하라고 했다면 그 고초를 어이 감당했을까!


계곡 가에 자라는 소귀나무, 2020.11.14 서귀포


나는 2020년 11월에 열두달숲 모임의 일원으로 제주도 식물을 탐사할 때 서귀포에서 소귀나무를 만났다. 그 때 소귀나무 열매를 식용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소귀나무 열매가 양매인 줄도 몰랐거니와 양매가 진귀한 과실로 <건정동필담>에 등장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몰랐다. 만약 그 때 알았다면, 그 소귀나무를 더 귀하게 찬찬히 감상했을 것이다. 언젠가 소귀나무 열매가 익어가는 6, 7월에 제주도로 가서 양매를 살짝 맛보고 싶다. 


(끝,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3년 5/6월, pp.90~96)


* 對馬島 宗貞盛也老仇 獻木芙蓉三株楊梅木株 命植于上林園. 세종실록

** 又進餠果 以余愛喫橘餠 蘭公自槖中不住拿出 有梅糖 余曰 此冬天開花之梅實乎 力闇曰 此楊梅也其色赤鮮 特大徑寸 五月間有之 喫畢 進菊茶各一椀 花瓣恰似甘菊 飮之頗有菊香 – 건정동필담 

*** 楊梅樹葉如龍眼及紫瑞香 冬月不凋 二月開花結實 形如楮實子 五月熟 有紅白紫三種 紅勝於白 紫勝於紅 顆大而核細 鹽藏蜜漬糖收皆佳 – 본초강목

**** <중약대사전>에 의하면 노귤盧橘은 금귤金橘(Fortunella margarita)의 이명이다, 금귤은 3~5월에 꽃이 피고, 10~12월에 열매가 익는다고 한다. 양매는 6~7월에 익으므로 열매 성숙시기가 다르다. 한편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는 노귤盧橘을 비파나무잎(枇杷葉)의 이명으로 사용한다. 비파나무 열매는 7~8월에 익으므로 소귀나무 열매 성숙기와 겹친다. 이 시의 노귤은 비파나무를 뜻할 수도 있다.

+++ 건정동乾凈衕의 한글 발음을 간정동으로 하기도 한다. 이는 홍대용이 필담을 나눈 장소를 북경의 감정호동甘井胡同이라고 추정하는데, 甘井의 원래 이름이 '마른 우물'을 뜻하는 '乾井'인데서 유래한다. 이 경우 乾의 뜻이 '마르다'이므로 발음이 '마를 간'이 된다. 7~80년대에는 대부분 건정동필담으로 표기하다가 최근에는 간정동필담으로 표기하는 추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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