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따러 텃밭에 들러 준 남편은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딸아이와 진한 보랏빛 기다란 가지 다섯 개를 물로 씻으며 부엌에서 웃었다. ‘가지가지 요리...’
그래, 오늘은 가지로만 저녁을 차려보자고.
딸은 가지로 만든 아랍 디핑 ‘바바가니쉬’를 시작하고 나는 가지전과 샐러드를 준비했다. 가지를 몇 개 사용할 건지, 조리 도구는 어떤 것으로 할 건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영역이 겹치지 않게 함께 시작하니, 요리 경연을 하는 분위기다. 한 시간 동안 함께 식탁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심판이 되는 양다리를 꼬고 앉아 조용히 기다린다.
중동요리를 맛있게 먹어 본 딸은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검색했다. 두 개의 가지를 반으로 갈라 에어프라이기에 넣어 굽는다. 구워진 가지 속을 파내어 마늘과 참깨, 레몬즙, 소금, 올리브오일을 함께 믹서기에 갈아 곱게 만들었다. 옆에서 예쁜 그릇을 꺼내 주고, 냉장고에 남은 식빵을 구워서 길게 잘라 주었다. 딸아이의 음식이 제법 멋지게 준비되었다.
내가 만든 가지전과 샐러드는 익숙한 요리라 금방 만들었다. 가지와 호박을 어슷하게 썰어 소금을 뿌려두었다. 물기를 빼고 순서대로 부침가루와 달걀 물에 묻혀 프라이팬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구우면서 둥글고 얇게 썬 빨간 고추를 한 개씩 올렸다. 밭에서 따 온 채소라, 키와 모양이 균일하지는 않지만 요리하는 내내 뿌듯하다.
샐러드를 위해 작은 잎채소를 씻어 우묵한 접시에 펼치고 아보카도와 밭에서 키운 방울토마토를 군데군데 올렸다. 가지는 감자 칼로 얇게 베어내어 생선구이용 팬에 구우니 검은 줄무늬가 멋지게 생긴다. 소금을 살짝 뿌려서 바싹 구워낸다. 그리고 살짝 식힌 가지구이를 샐러드 위에 멋지게 돌돌 말아 올렸다.
준비된 세 가지 음식을 식탁에 펼치니, 제법 멋진 레스토랑 테이블이 되었다. 딸이 준비한 중동 딥소스 ‘바바가니쉬’를 얘기하며 저녁시간은 웃음꽃이 피었다.
가지로 가지가지 준비한 음식을 맛보게 된 남편은, 직접 요리하지 않았기에 많은 수고와 정성이 들어간 느낌을 모를 것 같다. 제법 멋진 요리 재료로 사용하게 된 가지를 키우기 위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텃밭으로 향했던 나의 정성도 그는 모르겠지.
4월 봄날, 가지 모종을 심었던 날이 기억난다. 작은 이파리를 두 장 달고 있던 생명체를 두 손으로 조심조심 감싸서 밭고랑에 심었다. 가지 모종은 딱 두 개였다. 다른 식물들에 비해 성장이 더뎌서 과연 잘 크고 있는 것인지 가끔 궁금했다. 바로 옆에 심었던 오이와 토마토는 가지를 쑥쑥 내면서 농부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데 말이다.
처음 텃밭을 일구는 딸을 방문한 친정어머니는 가지가 주렁주렁 열려서 재미를 볼 거라 말해주셨다. 그때만 해도 가지는 천천히 키만 자라 가는 중이라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가지를 주렁주렁 매단 가지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도 했다. 초보인 내게 열매가 한두 개만 맺혀도 감사할 일이라고 미리 만족했기 때문이다. 앞날이 상상되거나 기대도 없던 작물이 바로 가지였다.
작은 가지 나무에 지지대를 묶어 주고, 자꾸만 불어나는 이파리를 한두 개 가위로 떼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라색 예쁜 꽃이 가지마다 피어나더니 반짝반짝 윤이 나는 기다랗고 둥근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지는 두꺼워지고 규모가 커졌다. 가지마다 열매를 기다랗게 매달고 있는 모양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주렁주렁 지팡이를 맺고 있는 가지나무는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열매에 햇빛이 잘 들도록 넓은 잎들은 잘라내고, 매일 물을 주었다. 중간에 웃거름도 주어 신경을 썼다. 지금까지 두 그루 가지나무에서 대략 스무 개가 넘는 가지를 따냈다.
텃밭에서 따 온 가지는 찜기에 쪄서 간장과 참기름을 넣어 무친 가지나물을 만들기도 했다. 어슷한 모양으로 썰어서 간장과 기름에 볶아 가지볶음 반찬을 했다. 에어프라이기에 소금을 뿌려 굽기도 하고, 프라이팬에 얇게 구워 샐러드에 올리기도 했다. 가지의 쓰임을 잘 몰라서 더 다양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더디게 자라난 가지를 기다리며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던 것에 대한 보상은 이미 다 받은 듯하다. 가지나무가 준 스무 개 넘는 열매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풍성한 나무는 잘 기다린 초보 농부에게 최고의 상이다.
나이가 들어가도 기다림의 수업은 계속 연장되는 과목이다. 자녀를 키우며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야 하는 것도 그렇고, 멋지든 그렇지 않든 예쁘다고 격려하고 잘 참아주는 것도 기다림이다. 나와 다른 성향의 남편도 내게 맞도록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도 기다림의 수업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까지는 급하지 않게 잠잠히 기다린다. 요거트를 만드는 데도 여덟 시간이 필요하고, 매실 청을 만들어 맛보기까지는 적어도 백일을 기다려야 한다.
세상에는 기다려야 하는 훈련이 필요한 곳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잘 기다린 자에게만 보상은 주어진다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한다. 급하다고 김을 빨리 뺀 밥솥에서는 설익은 밥을 먹어야 하고, 퇴고가 부족한 글은 오타와 어색한 문장들이 수정되지 못한 채 읽힌다. 결과물을 빨리 보지 못할지라도 꾸준히 물을 주며, 기대한 가지처럼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을 오늘도 하면서 열매를 기다린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누군가의 고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