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부아가 많은 사람

명상을 배울 준비

by 스티카 Stica

"왜 그렇게 부애(부아)가 났어."

내가 사소한 일로 씩씩거리고 있으면 남편이 하는 말이다. 여기서 "왜"는 부아가 난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다기보다는, 그렇게(까지) 부아를 내는 정당성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옳다. 그리고 그는 사실 매번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진실한 궁금증이라기보다는 그렇게(까지) 부아를 내는 나에 대한 핀잔인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내가 속에 부아가 많은 사람이라 그렇다.


오늘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 일이 있다. 지난주 금요일에 올린 프라하 여행 영상이 사상 최다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기에(그래봤자 350, 350만이 아니고 그냥 350이다), 신바람이 나서 후속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 이동식 하드디스크를 꺼냈는데, 하드디스크에도, 6개의 메모리카드를 모두 뒤져보아도 이틀분의 영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을 꼭 감고 단념하자, 마음 먹었다. 어차피 우러나온님의 여행 영상을 학수고대하는 사람은 너님이 유일하지 않은가.


그래도 현지인들로 가득한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호젓하게 생맥주를 들이키던 장면이 자꾸 어른거려 속이 쓰렸다. 하지만 화근은 나였을 것이다. 아둔한 손놀림으로 제대로 보지도 않고 한꺼번에 삭제해버렸겠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아있는 파일들로 편집을 시작해보려고 했다. 이동식 하드디스크에 있던 467개의 파일을 PC 로컬로 가져오는데 용량이 부족하단다. PC내 저장공간을 확보한 뒤 다시 복사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제는 특정한 한 개 파일 때문에 파일을 가져올 수가 없다며 복사를 자동 취소해버린다. 같은 시도를 두 번 더 했을까. 그래도 안 되자, 로컬에 복사된 영상파일 하나를 시험삼아 재생해 봤다. 화면이 깨진다. 영상 재생 시 화면깨짐 현상은 지금 쓰고 있는 맥북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퇴사 후 내가 집에서 쓰기 위해 사둔 개인 샤오미 PC를 남편에게 주고 남편 맥북을 갈취해서 쓰고 있다). 시스템 종료 후 재시작하면 괜찮아졌던 이슈라, 일단 꺼두기로 했다.


점심으로 '북어라면'을 끓여 먹었다. 콩나물 한 줌, 마늘 네 톨과 대파 한 대를 추가로 넣고 끓인 뒤, 명란 한 조각과 계란 한 알을 올려 푸짐한 한 그릇을 먹었다. 고양이 두 마리에게도, 섬유질 펠렛 반 스푼, 신장병 처방식 건사료 세 알을 불려둔 물에 습식 사료를 섞어 점심을 차려 줬다.


역시 식사를 하니 기운이 난다. 다시 PC 앞으로 돌아와 이동식 하드디스크를 꽂아 본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경고 메세지. 첨부된 디스크는 이 컴퓨터에서 열 수 없으니 추출/무시/초기화 중에 고르라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초기화"를 옵션으로 제시한 것이 몹시 불길하다. "무시"를 눌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PC에서 이동식 디스크를 열 수 없게 되었다. 뺐다가 다시 꽂아봐도 같은 반응. 결국 초기화 밖에는 답이 없는 것인가?


이 망할 이동식 하드 디스크는 퇴사 전 취미로 유튜브를 시작하기 위해 샀다. 여행을 다니며 영상파일을 백업해두려면 용량이 넉넉해야지, 하며 분에 넘치게 2테라바이트나 되는 것을 삼십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주고 샀던 것이다. 손바닥보다도 작고 가벼운 이 물건에 2테라바이트를 보관할 수 있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내 너를 그토록 신뢰하여 모든 자산을 너에게 위탁해두었건만.


어디서 잘못된 걸까. 한 개 파일이 잘못되어 복사를 실행할 수 없다고 할 때 같은 시도를 계속해서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고보니 남편은 항상 "전자기기는 갓난아이를 다루듯이 써야 한다"고 했다. 내가 고프로 전원을 끄지 않은 채 배터리를 제거하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했던 말이다. 결국 이 화는 내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제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나요.' 라는 말이 나왔다. 대체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부아가 많은 사람들은 아마 알텐데, 부아가 난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일단 수증기가 빠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쉽게 대상화가 되는 관련성 있는 사물의 근처를 벗어나는 것이 좋다(맥북이나 이동식 디스크에 물리적 힘을 가하는 등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지 않다면). 서재를 나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마침 갓 읽기 시작한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2>가 소파 위에 그대로 있다. 10월에 위빳사나 명상 코스를 가기 전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1편은 2주전에 다 읽었고, 2편도 있길래 빌려온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아래와 같은 단락을 읽게 되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 나는 암 때문에 화가 나 있었어요. 암이 나한테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암은 이미 생겼고, 나의 힘으로 암을 없앨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또한 내 삶은 어떠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기대에서 벗어나,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몸이라는 존재의 실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 성질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아주 간단했고, 내가 화학요법을 거쳐가는 데 필요했던 도구 그 이상이었습니다.



"암 때문에 화가 나 있었어요"를 읽자마자, 내가 탄식하며 속으로 내뱉은 '아니 제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나요.'를 주워담고 싶어졌다. 인생의 역작이 될 소설을 써 둔것도 아니고, 당장 어딘가에 제출해서 밥값을 벌 결과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고작 과거의 흔적들로 가득한 파일들을 잃어버린 게 그다지도 화가 날 일은 아니었지 않나. 게다가 원흉이 나 자신이라면 더더욱.


사실 비슷한 생각을 어제 저녁 남편과 달리기를 하면서도 했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장소에는 러닝트랙과 걷기트랙이 구분되어 있는데,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어린 손녀 셋과 자꾸만 러닝트랙에서 (병렬로) 배회하셨다. 그 중 한 손녀는 걸었지만 다른 두 손녀는 각각 킥보드와 유모차를 타고 있었다. 나는 달리기가 아직 익숙치 않고 서툰 편이라, 손녀들을 마주칠때마다 부딪힐까 두려워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었다. 아마도 트랙 구분을 잘 못 보셔서 그런 것일테지, 라고 이해할 법한 상황이었는데도 세번째로 마주쳤을때는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다.


나는 왜 이런 일에 이다지도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일까? 35분 달리기를 마칠 때까지 생각했다. 심지어 경의선 숲길을 뛸 때에도, 가끔씩 병렬로 서너명씩 손을 잡고 산책하는 분들을 볼 때면 내심 원망스러워했다. 달리기 전용 트랙도 아닌 산책로를 가족들과 한가로이 거닐고 있을 따름인 사람들을.


무엇이 그렇게까지 아쉽고 속상한가? 무엇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기에 실망하고 화를 내는거지?


전에 읽은 질 볼트 테일러의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가 기억난다. 뇌과학자가 뇌졸중을 겪으며 좌뇌 기능이 정지하고, 거의 우뇌만을 사용하게 된 기간 체험한 이야기다. 좌뇌의 주된 기능이 피아를 구분하고, 외부세계의 구성 요소를 구분하도록 하는데, 그런 기능이 억제된 채로 우뇌를 사용하는 동안 경험으로써 물질간의 연계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명상을 하면 활성화되는 영역과 기능도 우뇌에 집중되어 있고, 명상을 통해 실제적인 삼라만상의 연결성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지금 읽고 있는 위빳사나 명상 책에서는 이 모든 것이 흐른다는 것을 경험(누군가의 설득에 의해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느끼게)하게 되면 무상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나'라는 자아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감각이 일으키는 반응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고. 나는 이제까지 다섯 번 정도 명상을 시도해봤는데, 한 번도 그런 경험에 성공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10월의 명상 코스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다. 나도 내 마음 속 부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명상 코스에 참가하기 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가야겠다. 에너지는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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