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노동, 경제적 자유
그럼 이제 소는 누가 키워요?
팀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내 퇴사 소식을 들은 옆팀 팀장의 반응을 전했다. 네? 소를 키운다고요? 하고 묻자, "소는 누가 키워"를 모르냐며, 어디에서 유래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실무는 누가 하느냐"는 뜻이라고 했다. 설명을 들으니 와 닿는 말이었다. 특히 축산업이 아닌 옛 시대 일반 농업의 맥락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달 반 동안 하고 있는 일은 요가, 독서, 영상제작, 글쓰기다. 모두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고 돈이 되지 않으므로 본질적으로는 취미활동이다. 다만 영상제작과 글쓰기의 경우 수익화에 성공한 사람들이 꽤 많아보여, 꾸준히 의미있는 창작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면 경제활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작과 돈벌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영 개운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요즘 같이 창작물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다양한 분야의 창작물이 범람하는 시대에 '창작'이 나의 주된 수입원이 되기를 바라는(그리고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아하는) 내 마음이 옳은 것일까?
이 의문이 내포하는 첫번째 문제점은 당연히 나의 경쟁력이다. 주된 수입원이 될 만큼 충분한 규모는 차치하고라도, 내 창작물이 일원 반푼이라도 벌 수 있는 교환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 하지만 경쟁력을 갖는 법, 즉 '잘 하는 법'은 이미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기 때문에, 조언과 노하우가 그래도 많이 논의되고 또 공유된다. 물론 장인의 레시피를 안다고 모두 같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경쟁력'의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번째 문제점이 나를 계속해서 망설이게 하고 찝찝하게 하며, 속 시원한 해답을 찾기 어려웠다. 모두가 글과 영상을 만들면, 누가 농사를 짓고 자동차를 만들며 물자 운송을 하지? 라는 것. 나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밥을 먹어야 하고 교통수단이 필요한데.
내 근로에 대한 수요를 명백히 가지고 있는 직장에 일자리를 얻었을 때는 해본 적 없는 고민이었다. 회사는 구체적인 직무(예: 소를 키우는 일)에 사람이 필요해서 날 고용했고, 나는 근로를, 회사는 급여를 주고 받았다. 근무시간 동안(인간의 존엄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내 육신과 정신은 그들의 것이었으므로 급여를 받는 데 죄책감이 든 적은 없었다. 월급을 더 많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시키는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생각해보니 쉬웠던 거다. 게다가 충분히 많이 가진 자(회사)로부터 받는 급여라는 점, 전문적으로 채용을 결정하고 급여를 책정하고 인사를 운영하는 조직을 거느린 자(회사)가 어련히 가치판단을 했을까, 라고 내 노동의 객관적 가치를 믿을 수 있었던 점도 돌이켜보니 도움이 된 요인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좀 더 내가 주관적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보니, 한심하게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지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웠다. 아무도 시키는 사람 없이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서 결정한 퇴사였는데, 정작 내게 선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 주춤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주 이런 고민들을 하던 중, 책 <The Millionaire Fastlane> (부의 추월차선, M.J. De Marco)를 다 읽었다. 4월 중순에 교보문고에서 원서로 사서 단숨에 수십 페이지를 읽고, 절반쯤 읽었을때 멈춘 채 그대로 두었던 책이다. 책을 산 첫 주에는 서재 구조를 바꾸고 관음죽 대형화분을 주문해서 좌 Financial, 우 Freedom (경제적 자유) 문구를 쓴 리본을 달아두기까지 했다. 나만의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해보며 꿈에 젖어 지낸 일이주가 금방 지나가고, 5월부터 일이 갑자기 바빠져 허튼 생각은 할 겨를이 없어졌었다. 결국 사업 계획은 고사하고 이직 준비도 시작하지 않은 채 두달 후 퇴사를 하게 되었지만.
책의 전체적인 테마는 처음부터 명확하다. 젊을 때 열심히 돈을 벌어 은퇴를 기다리라고 얼르고 달래는 말에 넘어가지 말고, 가혹하리만치 검소한 생활을 평생 유지할 필요 없이, 필요조건을 충분히 갖춘 사업을 시작해서 일정기간 충분히 벌어 오랜 기간 경제적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책을 중단 없이 계속 읽지 못했던 이유는 내 취향보다는 다소 극적인 비유들이 많은 문체에도 있었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사업모델(그는 "money tree", 돈 나무를 만들라고 한다)을 과연 나 같이 자기확신 없는 사람도 해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책을 집어든 이유는 애초에 이 책이 내 시간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직장에서 일정규모 이상의 일과 시간을 비자율적으로 헌신하도록 요구하는데, 나는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책에서는 바로 그것(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서행차선 (Slowlane,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벗어나야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책을 끝까지 읽다보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책을 다 읽은 지금, 여전히 경제적 자유는 요원하다. 경제적 자유는 차치하고 직장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프리랜서의 자격도 내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알 것 같다.
결국에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 몹시 불안했던 것이다. 창작이든 사업이든, 오롯이 내 힘으로 가치를 제공하고 인정받아 대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고상한 척하며, 농업이니 운송업이니 하는 보다 유형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하는 본질에 벗어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농사를 하고 싶은가? 택시 운전을 하고 싶은가? 할 수나 있나? (나는 화초 하나 제대로 못 키우고, 택시는 커녕 자동차 운전을 자격증 실기수업과 시험 볼 때 빼고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농부도, 택시나 화물트럭 기사도 글이나 영상을 소비할 수 있지 않은가? 충분히 좋은 글, 좋은 영상이라면.
나만 편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위선적인 의문도 우습다. 그래서 고생스럽게 살고 싶다는 건가? 아니다.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맞다. 경제적 자유를 이미 이룬 것도 아니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라도 된 것처럼 서민들이 브리오슈를 먹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앉아 있었던 것도 기가 찰 노릇이다.
책에서 내가 깨달음을 얻은 부분은, 몰랐던 바 아니지만 콕 집어 간결하게 제시된 아래 문장이다. For money to follow “Do what you love,” your love must solve a need, and you must be exceptional at it. ("사랑하는 일을 해서 돈을 벌려면, 그러한 열정이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만 하고, 당신은 그 일에서 반드시 특출나게 뛰어나야 한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타고 내려가다 보니 드러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앞서 나는 경쟁력 때문에 고민을 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앞으로, 옆에서, 뒤로, 이리 저리 다시 들여다보니 경쟁력 때문이 맞다. 내가 혼자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로 누군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내가 그 일에서 특출나게 뛰어날 수 있나?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두려운 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도피처가 될 만한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어냈을 뿐.
7월 중순, 마지막 출근을 한 뒤로 한달 반이 지났다. "취미로" 쓴 글과 제작한 영상의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겸손의 미덕이 저절로 쌓여간다. 꽤 겸손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갈 길이 아주 먼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