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스트릿 재즈 페스티벌 231125
누군가 내게 어떤 음악을 가장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단연 재즈다. 재즈라는 이름으로 마주한 음악은 거의 예외없이 좋았고, 인상 깊은 순간의 음악은 언제나 재즈였다. 그럼에도 불구, 나는 재즈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은 거진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문외한이다. 재즈(혹은 나아가 음악 전반)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까지는 열렬하지 않아서일수도 있고, 이제껏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가시적 효용을 발생하는 행위에만 투자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지에 대한 변 치고 너무 진부하지만.
그런 내가 백수의 신분으로 치앙마이에서 한달 씩이나 머무르는 이상, 여기서 재즈를 열심히 듣고 가야하지 않겠냐는 욕심—내지는 가성비 극대화를 추구하는 실리주의 근성—을 부리지 않을 수 없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펍은 The North Gate Jazz Co-Op(이하 “노스게이트”)인데, 그 외에도 재즈펍이 다섯 개나 더 있다. 노스게이트에서는 100밧 맥주 한병이면 시간 제한 없이 재즈를 맘껏 들을 수 있다! 단, 워낙 인기가 많아 공연이 제대로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당연스러운 단점이랄까. 남편이 와 있는 동안 함께 노스게이트를 두번 갔는데, 그때마다 밴드 보컬들이 “치앙마이 스트릿 재즈 페스티벌”이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진행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몹시 구미가 당겼지만, 평시의 노스게이트만 하더라도 이미 매우 북적이고 혼잡한데, 무려 페스티벌을 (정신적) 에너지가 태부족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 티켓 구매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카페인 과섭취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지새우던 밤,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해버렸다. 부유하지 않은 게으름뱅이 특성상, 모종의 금전적 투자를 해두어야 본전 생각에 몸을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페스티벌 기간 내내 유료 공연이 계획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연은 각 재즈펍에서 (평소대로 입장권 필요 없이) 진행되고, 11월 25일과 12월 3일 공연만 일일권과 양일권을 판매하고 있었다. 일반티켓과 VIP티켓의 가격차가 일일권 기준 한화 약 6천원에 불과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VIP티켓을 구매하기로 했다. 12월 3일 일일권은 매진인데 반해, 11월 25일 일일권은 아직 남아있었고, 두 일자를 모두 포함한 양일권도 남아 있었다. 11월 25일 라인업이 별로인가. 그 날은 전통음악과의 퓨전 재즈 공연이라는데, 그래서 인기가 없는걸까.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VIP 양일권을 구매해버렸다. 티켓 가격은 1100밧. 서비스 차지며 환불보험 (129.5밧—왜 들었지?)까지 더하니 1304.4밧으로, 한화 약 4만8천원 수준.
11월 25일 공연은 Lanna Architecture Center의 정원에서 진행되었다. 란나왕국 건축 관련 전시관으로, 센터 건물이 지은지 100년도 넘게 되었단다. 오후 5시에 시작이라고 해서, 근처 카페 탐방을 가서 커피 맛을 보며 책이나 좀 읽다가 가야겠다는 심산으로 3시에 집 문을 나섰다. 볼트와 그랩을 번갈아가며 (가장 싼 옵션으로) 차를 불렀는데 잘 안잡혀서, 결국 그랩의 좀 더 비싼 옵션을 선택해 호출했더니 그제야 차가 잡혔다. 길도 조금 막혀서, 목적지 Twenty Mar 카페에는 3시 35분쯤 되어서야 도착. Twenty Mar의 더티커피가, '그전까지 마신 더티커피는 모두 가짜'라는 급진적 주장을 하게 할 정도로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에 차 있던 터였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 공연 시작시간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전날 받은 페스티벌 안내문자에서 개방 시간을 3시 40분으로 안내받았는데, 5시 시작이라면 개방이 너무 이른 것 아닌가? 그대로 서서 페스티벌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어 일정을 재확인했더니, 오후 4시에 ‘Grand Opening’이라고 쓰여있었다. 반면 티켓 구매 페이지상 공연 시작시간은 5시. 조급증이 있는 나는 혹시라도 중요한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그냥 카페를 패스하고 공연장으로 걸어갔다.
정원에 마련된 공연장은 크지 않았다. 100석은 되었을까. VIP석은 맨 앞 두줄이었고, (일반석이 플라스틱 등받이 의자인데 비해) 널따란 대나무 받침대 위에 방석과 쿠션 등받이를 올려둬, 앉은다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자리였다. 아직 시작시간이 안 되어서인지, 아니면 생각했던대로 인기가 없어서인지, 미리 앉아 있는 사람은 두 명 뿐이었다. 오늘 행사에서는 알코올 판매와 흡연 금지라더니, 그래서 더 한산한지도 모른다. 아직 해가 뜨거워, 첫째 줄에서 직사광선을 받지 않는 왼쪽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오후 4시를 훌쩍 넘겨서도, 공연장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설상가상, 그늘진 자리랍시고 선택한 내 자리가 지는 해의 동선에 들어맞아, 온몸에 직사광선이 따사롭게도 내리쬔다. 선케어가 노화관리 핵심이라는데, 오늘도 나는 남들보다 일이년 더 빨리 늙고 있겠구나.
4시 40분쯤 가까워서, MC인 듯한 두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나왔다. 여성 1인(내가 좋아하는 방송인 풍자님을 닮았다)과 남성 1인이다. 여성분은 예전에 (아마도 무명 재즈) 가수였다고 하고, 남성분은 재즈펍 노스게이트를 운영하는 색소폰 연주자다. 이런 저런 소개들이 끝나고 그제야 공연이 시작되었다. 란나전통 음악을 배경으로, 전설 속 동물 두 마리의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었다. 공작 비슷한 동물의 춤과 표정은 사랑스럽고 우아한데 반해, 염소나 산양과 흡사해보이는 동물의 춤은 익살스럽고 흥겨웠다. 전통음악과 접목한 재즈를 선보인다더니, 아직 재즈와의 접점이라고는 전통악기가 아닌 색소폰이 배경음악에 함께 참여했다는 정도밖에 잘 모르겠다.
첫번째 밴드는 Slip Isan. 태국 동북부 이싼 지역 전통음악과의 퓨전 재즈였다. 뮤지션들이 모두 스무살밖에 안되었다고 하더니, 다들 앳된 얼굴이다.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다. 특히 가운데에 서서 상반신만한 나무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여자분이 참 귀엽다. 통통한 체구, 동그란 초콜렛빛 얼굴. 새까만 머리는 쪽을 진 것마냥 깔끔히 뒤로 넘겼다. 연주에 몰두했다가 추임새도 넣다가 하며 짓는 순수한 표정이 매력적이다. 그녀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음악의 지역색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
다만 전반적으로 악기들간의 조화라던지, 선곡이나 무대 퍼포먼스는 솔직히 내 취향과는 별로 맞지 않는다. 베이스 소리가 제일 크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연주자 없이 MR로 틀어둔 관계로 리드미컬한 연주 장면을 감상할 수 없다. 또, 보컬을 맡고 있는 듯한 키 큰 남자분이 중간중간 ‘후루룰루루’ (내 느낌엔 아무래도 태국이라기보다 아메리카 원주민같은)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춤을 추는데, 그 몸짓이 촌스럽게 느껴진다면 너무 건방지려나. 그렇게 서너곡을 한 것 같은데, 모두 다 비슷한 느낌의 곡이어서 나중에는 지루했다.
두번째 밴드는 Pui Fai. 란나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남녀가 함께 부르는 “쩌이 서“(‘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이제는 아주 시골에나 가야 접할 수 있단다)에 기반한 음악이었다. 각 곡에서 전반적인 지역색은 유지되면서도, 곡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관람 포인트는 이번에도 여자 분인데, 보컬을 맡은 그녀는 처음부터 심상찮았다. 검은색 반팔티셔츠에 코끼리바지 재질 꽃무늬바지를 입고, 조깅화같은 흰색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전통적이지도, 모던하지도, 그렇다고 믹스매치의 느낌으로 세련되게 계산된 것도 아닌, 무대 위에서 보는 느낌이 묘하게 독특한 패션. 그녀는 ‘흥부가 기가막혀’와 비슷한 춤을 아주 맛깔나게 추는가 하면, ‘전국 노래자랑’의 재래시장 편에서 본 듯한 관객 호응 유도까지 노련하게 해내는 프로 예술인이다. 보컬 덕에 킬킬대며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공연이 재미있다. 전반적인 곡조가 우리나라 트로트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써우”라는 우리나라 해금처럼 생긴 전통 현악기의 음색이, 바이올린이 밴드 음악을 이끌어가듯이 낯설면서도 우아하게 어우러지며 곡을 주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게 재즈라고? ‘재즈’에 기대했던 바가 충족되지는 않는다. 첫번째 팀에서처럼 서양악기인 드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신구의 조화라거나 복합적인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 다음은 Kong San Sieng이라는 밴드다. 무려 여덟 명의 연주자가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한다. 모두 전통악기. 그 중에서도 마림바와 비슷한 Ranat Ek Lek이 가장 듣기 좋다. 덩치가 듬직한 털보연주자가 연주하는데, 구슬 굴러가는 신비로운 소리를 내는가하면, 박진감 넘치는 리듬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름 모를 두 관악기가 뿜는 성량도 대단하고, 북처럼 생긴 타악기의 연주자도 카리스마가 넘쳐 흐른다. 태국 TV에도 자주 나오고 여러 지역으로 공연도 다니는 핫한 팀이란다. 그래서인지 퍼포먼스도 관객 몰입도를 훌쩍 끌어 올리기에 충분하다. 지루할 틈이 없다.
그렇지만, 재즈라면서? 이쯤 되니 재즈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보고서라야 의문을 갖는 것이 타당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렴 이 사람들이 전문가이지 내가 전문가인가. 음악 전문가들이 ‘재즈’라는 타이틀로 이 음악들을 큐레이션했을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터. 공연을 보다 말고 ‘재즈’를 검색해봤다. 기원이야 미국의 흑인 사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재즈 안에서도 수많은 장르가 발전되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하드밥과 보사노바도 서로 확연히 다른 음악풍이 아니던가. 재즈의 정의와 관련하여 위키피디아를 참조해 보면, 기본적인 특질로서 즉흥 연주가 이끌어내는 자연스러움과 활기, 그리고 음악가의 개성을 반영하는 음색과 노트의 구성을 꼽는다. 그것을 공유한다면, 재즈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곱씹다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에서 멈추었다. 재즈를 정의할 능력이나 자격 같은 게 내게는 있을리 없다는 것. 엘라 피츠제럴드가 그랬듯 ‘샵빱뚜비두바’ 하는 멋들어진 스캣을 뽑아낼 수 있으면 몰라도. 더 이상의 의문은 접어두고 공연을 즐기기로 했다.
마지막은 Collective Jazz. 앞서 나온 각 밴드가 한데 섞여서 하는 공연일줄 알고 기대가 가장 적었다. 일찍 자리를 일어나야할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공연 문화에 익숙치 않은 내가 오판했던 것. 원래 제일 큰 기대를 받는 공연에 최후 순서를 배정하는 법이지 않나.
내가 일반적인 재즈 연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베이스와 드럼인데, 베이스 연주가 뛰어나고 (연주자가 재즈펍 Moment’s Notice를 운영한다고 했던 것 같다), 드럼도 혼을 실은 연주가 인상적이다. 또, MC를 보던 남자가 색소폰을 불고, 뉴올리언즈 출신의 미국인 스티븐이라는 사람이 트럼펫을 불어, 음악을 가득 눌러 채운다. 그리고 전통 관악기 (처음엔 트럼펫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고 그 다음엔 플룻과 유사한 것으로 바꾸었다)를 연주하는 분이 있었는데, 다른 악기들에 밀려나지 않고 그렇다고 지배하지도 않으면서 딱 알맞은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전통관악기, 트럼펫과 색소폰, 이 세 악기가 동시에 연주될 때는 신기하리만치 이색적인 하모니가 나왔다. 연주자들 중 스티븐이 눈에 익은데, 남편과 노스게이트에 갔던 날, 다리 한쪽을 약간 걷어올린 조거팬츠 차림에 크로스백을 멘 배낭여행자 차림으로 바에 도착해서는, 뒤늦게 (크로스백을 그대로 멘채) 연주에 합류했던 사람이다. 그때도 무심히 와서는 완전히 프로 연주를 한다며 남편이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단발머리를 뒤로 묶고 있어 여자같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건장한 체격이 머리 기른 남자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오늘은 반팔 셔츠 원피스를 입고 왔다. 원래 한 팀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은 아니고, 이런 태국 전통음악과의 퓨전 곡 연주는 처음이라는데, 역시 재즈 연주자답게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왠지 모를 아쉬움이 일었다. 재즈를 보는데 술이 없어서 그랬을까, 내멋대로 기대했던 유형의 음악을 충분히 못들어서였을까. 집 방향으로 삼사분 걷다가 방향을 틀어 노스게이트로 향했다. 역시나 노스게이트는 만석. 연주가 잘 보이지 않는 야외 구석에 난 자리를 가까스로 차지하고 싱하 맥주 한 병을 샀다. 백밧.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도착하자마자 곡이 끝나버렸다.
그러고선 한참을 새로운 밴드가 안온다. 브런치 앱으로 꼬리뼈 다친 이야기 글을 다시 읽으며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아주 조금 수정했다. 삼십분도 넘게 지나서야 다음 밴드가 도착했다. 그렇게나 기다려놓고, 막상 연주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좀처럼 흥이 나질 않는다. 두번째 곡이 시작하자마자 볼트 택시를 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가 공연을 좀 더 봤다.
택시가 도착했다는 앱 알림에 공연을 관람하는 무리에서 비켜나와 차도로 가던 중, 키가 낮은 도로분리대를 미처 보지 못하고 정강이를 세게도 찧었다. "흐억!" 균형을 잡고 일어섰는데, 옆에서 맥주 한병을 들고 공연을 보고 있던 남자 한명이 세번이나 연거푸 괜찮냐고 묻는다. 마지막 세번째 질문까지 괜찮다고 대답하자, ‘Nice legs’라고 한다. 내가 실제로 멋진 다리의 소유자였다면 진심으로 고마웠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어떤 nom인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니, 두 눈이 토끼처럼 반짝이고 있다. 고맙다고 하고 차를 타는 나의 등 뒤로 ‘어디에서 왔냐’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대답할 겨를도 없고 생각도 없지만 어딘가 웃기다.
차가 출발했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