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빨간 맛
한달살기를 하는 내내 줄곧 집 밖으로 나갔다. 요가원 수업 말고도, 식당과 카페를 여기저기 찾아 다니며 익명의 사람들과 부대끼는게 좋았다. 말 한마디를 섞지 않아도, 낯선 이들 사이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일견 상호양립이 어려울 것 같은) 자유와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떠나왔고 떠나갈 사람으로서 타인과 그 어떤 기대도 섞지 않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자유를 확인하는 한편으로,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동료 인간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고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부터 좀처럼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루 한 번은 꼭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두세번씩 찻집이나 카페에 찾아다니던 내가, 어쩐일인지 외출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어제 아침 아쉬탕가 요가 마이솔 수업 후, '카오소이 매싸이' (Khao Soi Maesai, 빕구르망!)에서 9시경 카오소이(50밧)를 한 그릇 먹고 집에 온 뒤로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과일을 비롯한 식료품과 저녁식사 모두를 그랩으로 배달시켰다. 저녁은 역시나 미슐랭 빕구르망 맛집이라는 '쏨땀 우돈' (Somtam Udon)에서 시켜 먹었는데, 액젓을 넣은 파파야 샐러드(55THB)와 (돼지껍질 튀김을 추가한) 포멜로 샐러드(80+50THB)를 시켰다. 둘다 샐러드라서 동일한 양념에 재료만 다를 것 같지만, 양념이 서로 다르다. 파파야 샐러드는 액젓이 좀 더 깊고 진하며, 포멜로 샐러드는 그보다는 살짝 가벼우면서 달큰하고 상큼하다. (진저 팜 키친 Ginger Farm Kitchen의 포멜로 샐러드는 레몬그라스도 넣어 향긋한 향을 배가했지만, 가격은 두 배가 넘는다.)
냉장고에 있던 Beerlao IPA를 하나 둘 꺼내마시다 보니, 세병을 다 마셔버렸다. 우습게도,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동안 시청한 유튜브 영상은 앤드류 휴버만(Andrew Huberman)의 <알코올이 당신의 몸, 뇌와 건강에 미치는 영향> (What Alcohol Does to Your Body, Brain & Health). 마귀가 나도 모르게 냉장고에 맥주를 세병씩이나 넣어뒀으니, 하는 수 없이 먹어치워야지. 맵싸한 샐러드에 맥주가 콸콸콸 잘도 들어간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하루종일 음식이 당긴다. 아쉬탕가 마이솔 수업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파인애플 한통, 파파야 한통을 먹었다. 그래도 고갈된 에너지가 충전이 되지 않아, 달걀까지 삶아서 서너개를 까먹었다. 배만 부르고 도통 몸에 힘이 나질 않는다. 정말 나로서는 하는 수 없이,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먹었다. 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싸고 맛있는 음식, (심지어 미슐랭 빕구르망 식당으로부터 배달되는) 카오소이, 쏨땀, 남니우(돼지고기국수), 쌀국수... 그 어떤 것도 아닌, 라면을 먹어야만 했다. 비상용으로 (혹시라도 아파서 몸져 눕거든 끓여먹으려고) 가져왔지만, 먹어야 할 현지 음식이 이렇게나 많은데 라면을? 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나의 신라면.
나는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는 지점이 꽤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부분이 음식이다. 외출이 금지된 명상센터에서 '가장 힘든 일은 떡볶이를 사먹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삼겹살 지글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신음을 내뱉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해 동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른 음식(그런게 있을까?)을 떠올리며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신성하리만치 특별한 음식을 향한 애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내가 일하던 중국 광저우에 몇달 와 있었을 때, 광동식 죽을 한 숟갈 입에 머금고서 '키야, 여기에 김치를 올려 먹는다고 상상해 봐!'라고 외쳤을때도 아, 그런가, 뜨뜨미지근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삼겹살엔 소주가 국룰!' 하는 식의 각종 '국룰'을 아무것도 실천하고 있지 않은 데 대해 희미한 소외감을 느껴왔다.
그래서 라면을 끓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황소만큼 배를 부풀리다 배가 터져죽은 개구리 엄마처럼) 배가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반면, 나도 고향의 맛을 찾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반가웠다.
최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면은 신라면 더레드. 기존 신라면보다 더욱 깊게 매워진 맛, 너무 달지 않은 맛이 내 입맛에 딱이다. 말 그대로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제야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고, 늦게나마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농심, 고맙습니다. 이렇게 간편하게 고향의 맛을 휴대할 수 있도록 해주시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