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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Dec 06. 2023

미식가 요가선생님과 성대한 오찬

제가 오십살 같아 보인다고요...?

치앙마이에서 아쉬탕가 요가 마이솔 수업을 시작하고 처음 일이주간, 자꾸만 일등으로 출석하게 되었다. 요가원에서 꼭 차지하고 싶은 자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수업 후의 일정에 쫓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게 선생님에게 부담만 드리는 것 같아, 나중엔 집을 나설 준비를 다 마치고도 일부러 집 안에서 뭉개보기도 하고, 새벽 일찍 눈이 떠져도 억지로 좀 더 누워 있기도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원치않는 일등 출석을 몇번이나 더 했다. 뿌리깊은 조급증에는 약도 없다.  


그 날도 일등으로 도착해서 매트를 펴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이런저런 말을 건네주었다. 태국음식을 좋아하냐기에 몹시 좋아한다, 했더니 매운걸 먹느냐 해서 아주 잘먹는다, 했다. 그러자 북부음식을 먹어보았는지 물어보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영 잭프룻 (Young Jackfruit)을 고추와 함께 빻아서 만든 샐러드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언제 시간이 되면 점심을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오, 현지인과의 식사라니! 나는 대번에 좋다고 했고, 여행자 신분이라 시간이 차고 넘치니 선생님 가능하신 시간에 먹자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현지인과 함께 식당에 가야지 맨날 똑같은거 말고 제대로 된 현지식을 맛볼 수 있다며, 모름지기 진짜배기 음식을 소개해줄 때에는 어느 식당에 가라고 말로만 하지 않고 직접 데려가야만 하는 법이라고, 사뭇 경건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현지인들만 아는, 영문 메뉴판이 없는 허름한(싼) 노포에 데려가주실 줄 알고, 시간내주시면 식사는 제가 살게요! 라며 큰소리쳤다. 떠오르는대로 말을 뱉어두고, 어린게 건방지다고 생각하시려나, 했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만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그녀와 점심을 먹었다. 선생님은 전날에 미리 왓츠앱으로 메세지를 보내 마야몰 앞 딱 저기에 서 있거라, 하셨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위치를 알려주시나, 했는데 실제 가서 기다리려고 보니 그렇게 위치를 약속하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다. 마야몰 문만 해도 여러 곳이고, 차를 몰고 와서 어디에 오래 댈 수도 없으니. 계획형 인간들이란 세상에 얼마나 이로운 존재인가.

선생님이 왓츠앱으로 보내준 사진. 빨간 화살표가 '딱 여기 있거라' 외치는 듯 하다.


그녀가 차에 나를 태워 간 곳은 Krua Phech Doi Ngam. 몇년째 미슐랭 가이드에서 소개하고 있는 식당인데, 선생님 말에 따르면 미슐랭에서 추천한 요리 자체는 별로이고 다른 것들이 맛있다고 했다. 관광지도 도심도 아닌 공항 근처에 위치해서 그런지, 미슐랭 가이드 식당 치고 지나치게 붐비거나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선생님이 Krua Pech은 다이아몬드, Doi는 산, Ngam은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줬다.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산'쯤 되는 것인가. 


선생님이 종업원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신 것 같은데, 주문이 끝나지를 않는다. 도대체 몇개를 시키시는거예요, 다 못먹어요, 말려야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덧니를 환하게 드러내고 웃으며 '내가 오늘 너 아주 즐겁게 해줄게.' 라고 하셨다. 본인은 대식가이자 미식가라며. 듬직하기도 하셔라.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본인이 올해 51세가 되었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한 살 제대로 먹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요가원의 어떤 영국언니 이야기가 나왔는데, 모델처럼 키가 아주 크고 호리호리한, 인도계로 보이는 (굉장히 젊어보이지만, 줄곧 나보다는 많이 언니일거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선생님이 그녀가 48세라고 하며, 너보다 언니지? 라고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영국언니가 40대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언니라는데는 놀라지 않았지만, 40대 후반이라니, 그것보다는 훨씬 젊어보이는데! 싶어 놀라움을 크게 표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너는 몇살이냐고 물었다.


- 나: (고개를 살짝 비틀어 측면으로 바라보며) 몇살 같은데요?

- 선생님: (미간을 찡그리며) 42, 43?


나는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터져나온 까닭은 신이 나서가 아니라, 서글퍼서다. 나는 그녀가 본 것보다 실제 일고여덟살이 어린 삼십오살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갸우뚱하며, 왜 웃지, 설마 더 많다는거야? 오십? 이라고 했다. 아잇참!


내 실제나이를 알려주자 그녀는 몹시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냥 솔직히 이야기하신거잖아요, 저도 피부가 좋지 않은 편이라 스스로도 평소에 나이들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걸요." 라고 재미있다는 듯 가벼이 이야기했지만, 그러는 내 속이 좋았을리야 없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닌 후, '어머, 그 분 안경 쓰셔야겠어요' 하는 반응에 위로를 받은 건 안비밀. 그런데 이 요가 선생님, 안경 쓰신다는 사실은 안안비밀.)


음식은 하나하나 굉장히 맛있었다. 얼핏 보기에 샐러리와 비슷하게 생겼고, 머위/토란대와 식감이 비슷하지만 두께가 좀 더 굵은 타로 줄기 뚠(ตูน, Toon)이 들어간 아래 수프 '깽 뚠 쁠라'(Kang Toon Pla)가 제일 맛있었다. 이제까지 태국에서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다고 했더니 기뻐하셨다.  

타로 줄기 뚠(ตูน, Toon)과 생선이 들어간 수프 '깽 뚠 쁠라'(Kang Toon Pla). 향긋하며 매콤한 맛. @Krua Phech Doi Ngam
선생님의 최애 영 잭프룻 (Young Jackfruit) 샐러드. 말 안하면 과일이라고 알 수 없는 마른 식감으로, 발효한 듯 쿰쿰한 맛. @Krua Phech Doi Ngam
개미알(!) 오믈렛. 동글동글 톡톡 터지는 식감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먹으면 그런대로 맛이 좋다. @Krua Phech Doi Ngam
닭고기 요리. 닭뼈가 큰데 비해 살코기는 별로 없었고, 같이 볶아 나온 푸른 채소가 맛있었다. @Krua Phech Doi Nga
가지 껍질을 벗겨 무쳐낸 요리. 고추양념을 넣고 무쳐 그런지 부드러우면서 맵싸해 맛있었다. @Krua Phech Doi Ngam


북부 전통 돼지고기 커리 Huang Lay. 달고 부드러우며, 땅콩이 들어있다. @Krua Phech Doi Ngam

맛있었는데 많이 남겼다. 처음 요리가 모두 나왔을때에는 남으면 싸 가자, 라고 생각했는데 찹쌀밥에 곁들여 이것저것 맛보다 보니 나중에는 배가 터질듯이 불러 정신이 혼미해져버렸다. 식사를 마쳤을 땐 당초의 계획 따위 잊은 지 오래. 가격은 총 811밧이었다. 이번 치앙마이 한달살기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비싼 식사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예고한대로, 과연 Huang Lay 빼고는 모두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고, 그녀와 함께가 아니었더라면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먹어보지 못했을 음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카페 'Much Room Cafe'에 들러 아이스 타이 티를 함께 마셨다. 혼자였거나 남편과 함께였더라면 오트밀크로 변경이 가능한지 물었겠지만, (그런 옵션이 메뉴에서 바로 눈에 띄지는 않아) 그냥 사바이사바이 하기로 했다. 일반 우유를 마시면 소화가 잘 안되기는 하지만. 원래 레시피대로 만들어서 그런지, 연유의 맛이 고소하고 좋았다.


선생님은 음식 말고도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행동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환경과 사람을 바꾼다한들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씩 깨우치고 바꿔나가며 성장해야한다고, '영적 대화'의 포문을 여셨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성장하면요? 그래봤자 계속 다른걸 또 깨우쳐야하는거 아닌가요? 끝도 없는 깨우침과 성장이 무슨 의미죠?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것 아닌가요? 라고 물었다. '그래도 성장은 의미있는 것이다'를 나아가 납득시켜주시기를 바랐는데, 그런 지혜까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본인이 겪은 내밀한 개인사를 들려주었다. 열살도 채 안되었을때 겪은 일과 올해 겪은 일이 서로 맞물리면서 그제야 이치를 깨달았다면서.


또, 인생을 한 아름에 담길만한 스크린에 재생시키듯 한발짝, 나와 바라보라고 했다. 아,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명상코스에서 내내 하던 이야기 아닌가. 강둑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듯 인생을 바라보라는 이야기. 슬픈 일에 뛰어들어 울부짖지 말라고. 그래서 또 나는, 그럼 기쁨과 행복은요? 마음껏 기뻐하지도 행복해하지도 말란거예요? 물었다. 그러니 그녀는, 오히려 너무 기쁘면 의심하라면서, 최고점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과정의 하락곡선이 오롯이 슬픔이 된다는 것을 알면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게 될거라고 했다. 최근, 즉각적이고 지나친 도파민 자극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잦은 금주와 음주를 번복하며 체감한 부분이었는지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선생님은 영적인 대화는 우연이 아니라면서, 우리가 만난 것과 우리가 대화를 나눈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러고서는 해맑게 손석구와 정해인과 최정훈(잔나비), 삼인 각자의 매력을 신이 나서 오래도록 이야기하셨다. 잔나비 최정훈이 요가를 하는데, 그가 카메라 앞에서 취한 동작들로 볼 때, 아무래도 아쉬탕가 요가를 하는 것 같아 몹시 기쁘다고도 했다. (그녀는 아쉬탕가 선생님이다.)




저녁에 남편과 통화하며 남편에게 "요가원 선생님이 날 몇살로 봤는지 알아?" 묻자 나를 많이 사랑하는 우리 남편이 "삼십?"이라고 해줬다. "아니, 오십." 하자 남편이 정색을 하고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라며 선생님을 욕해주었다. 


다행이다, 남편 눈에는 삼십으로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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