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홈에서 스위트홈 시청하기
내게 허용된 위탁수하물의 무게는 15kg. 미니멀리즘을 머리로만 지향하는 자의 한달 짐을 넣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인천공항의 항공사 카운터에서는 티켓과 어플에서 제시된 15kg와 달리 실제로는 17kg까지를 허용했다. 하지만 치앙마이 공항에서도 동일한(후한) 처사가 있으리라고 (기도는 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트렁크 짐의 무게를 확인하고 바로 빼낼 수 있도록, 파우치 서너개에 화장품, 요가복, 윗옷류, 바지류를 나눠담았다. 또, 여차하면 화장품 파우치에서 꺼내 현장에서 즉시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선스프레이와 헤어팩을 지정해두었다.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해보니 과연, 딱 15kg까지만 허용된다. 반면 내 짐의 무게는 19kg. 우선 요가매트를 기내에 휴대 가능한지 물었다.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가능한 경우가 꽤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단다. 우선 요가매트를 빼내 등에 메고, 선스프레이와 헤어팩을 꺼냈다. 마야몰 지하 Rimping 슈퍼 로고가 크게 박힌 부직포 장바구니에 파우치 두개를 옮겨담고, 짐 무게를 다시 재 보니 기적과 같이 15.0kg.
10초면 끝나기는 하지만, 공항에서 쭈그려앉아 트렁크를 열어젖히고 닫는 낯부끄런 작업을 하기가 싫어 그냥 돈을 더 내고 무게를 더해둘까 고민했었다. 5Kg 추가하는데 5만원. 막상 적잖은 돈을 더 내고 짐의 무게를 더하려고 하니, 이것저것 되는대로 다 짊어지고 사는 인생, 그리고 그런 인생을 지속하기 위해 (싸지 않은) 대가까지 치르는 생활과 다를 것이 뭔가 싶어져 관두었던 것이다. 정말 필요한게 뭔지 되짚고 추려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생각보다 '꼭 필요한 것'이 많지 않다고 손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요가매트를 들쳐메고 공항 보안검색대를 거쳐 라운지까지 갔다. 맨발에 샌달을 신고 있었는데도 탈화를 해야했다. 작년에 pp카드로 사용한 공항 라운지가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했는데(면적도 컸고, 과일은 신선했으며, 쌀국수도 말아주고 그랬던것 같은데?), 그 라운지는 로열 오키드(Royal Orchid) 라운지였을까. 이제는 pp카드 사용이 안되는지, 옆에 있는 Coral Lounge로 가라고 했다. 가 보니 이용객 90%는 한국인. 샤워룸이 없어서 대충 빠르게 세안만 했다. 오랜만에 와인을 좀 마시고 싶었는데, 와인은 Montclair라는 한 브랜드 뿐이고, 맥주는 Chang과 Federbrau, (처음보는 종류의) 칵테일이 있었다. 와인과 Federbrau 맥주, 칵테일까지 마셔봤는데 하나같이 맛이 그저 그랬다. 포르투갈에서 맛있는 와인 원없이 마시고 오자. 과일도 캔탈로프와 수박이 있었는데, 늦은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모두 서걱거리고 신선하지 않았다. 카오소이, 마살라 치킨 커리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요기를 잘 했다.
이륙시간은 23:30. 술을 마셔선지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이 잘 왔다. 중간중간 깨기는 했지만, 옆에 앉은 태국인 아주머니가 (내게 말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이) 자상한 분이셔서 비행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모자가 같이 여행하는 것인지, 그녀의 옆 복도 자리에는 머리를 탈색한 젊은 남자가 앉아 아주머니와 태국어로 가끔 조용히 한두마디를 나누었다.
도착해서도 아들분이 내 짐까지 내려줬다. 황송한 마음으로 (그러나 복화술로) 빌었다. 두 분, 부디 한국에서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한파라고 해서 단단히 각오했던 한국의 날씨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긴팔티에 패디드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오버사이즈 인조가죽 셔츠를 하나 더 걸친 차림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공항건물을 나올때는 열감이 가셔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고보니 한파가 지나갔다고 했었던가.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기 위해 티켓 판매 창구에 6015번은 어디서 타나요, 여쭤보니 B5-1이라고 알려주신다. 꽤 이른 시각(7시)인데 창구에 나와 계시는구나. 그런데도 피곤한 기색없이 친절히 알려주시다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버스 밖 풍경이 계절을 완연하게 입고 있다. 혹독하지 않고 포근한 겨울날이다. 한여름에 백수생활을 시작해서, 그 평온한 여름을 놓아주지 않으려 내 아주 멀리도 도망갔건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났구나. 창 밖으로 무심히 인사를 건네오는 겨울에게 나도 똑같이 무심하게 응수했다. 그래, 나도 이럴 줄 알고는 있었어.
집에 도착하니 고양이들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엄마!!!!!'하고 우다다다 달려왔다기보다는, 살짝 '얼레, 너 누구야? 냄새 좀 맡아보자'하며 엉거주춤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녀석들을 붙들어 껴안고 사정없이 뽀뽀했다. 저리 좀 치워, 라며 두 발로 밀어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밥과 간식을 주는 것은 물론이요, 안고 뽀뽀할 수도 있으며 함께 잠도 잘 수 있는 고양이들이 사는 내 집으로 왔다. 치앙마이를 떠나오기 직전, 지내던 콘도 엘리베이터에 붙은 아래 게시문을 보고 뜨끔했었던 것이다. 콘도 앞 빨래방 근처에서 몇차례 고양이들에게 츄르와 간식을 준 적이 있는데, 그때 나를 본 누군가가 제보라도 한 것일까.
저녁에는 남편 퇴근을 기다려 마라탕을 배달시켜 먹으며 <스위트홈 2>를 봤다. 넷플릭스에 올라온지 며칠 되었지만, 둘이 함께 시청하려고 아직 보지 않고 있었다. 5화까지 연달아 보고나니 어느새 자정을 넘긴 시각. 시즌1의 '그린홈 아파트'에서 시즌2의 '스타디움'으로 '스위트홈'이 옮겨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캐릭터가 많아 다소 산만하고 몰입이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와 남편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아주 사소한 것이 아쉬운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알 것 같은 것은 바로 음악. 시즌1에서는 Imagine Dragons의 Warriors가 나올때마다 윗 팔뚝에 전율이 흐르는 감각이 있었더랬다. 그런데 시즌2에서는 아직 비슷한 전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맘 푹 놓고 간 치앙마이에서 한달살기가 끝났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지만 한달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지나가버렸고, 그런데 반해 아쉽지는 않았다. 안해본 일(한달살기)을 해보면 무언가 생각지도 못한 일도 일어나고, 가져보지 못한 감정이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한달이 지나는 동안 체감할 수 있었던 신체와 사고의 변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달이 부족하여 더 살아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치앙마이에서는 당분간 아니오, 라고 대답할 것 같다. 한달살기를 해 볼 여력이 더 주어진다면 이제는 조금 더 새로운 곳으로 가보고 싶다.
아주 아름답게 기억되는 장면들은 여러 개가 남았다. 남편과 톤 빠욤 시장 (Ton Phayom Fresh Market) 에서 막 튀겨내 토독토독 소리가 아직 나는 돼지껍질 튀김을 한 봉지 사들고 치앙마이 대학을 걷다가, 갑자기 내린 비에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간 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 위로 화음을 얹으며 돼지껍질 튀김을 와자작 씹어먹은 일. 또, 남편과 무엥마이 시장 (Mueng Mai Market)에서 시내의 삼분의 일 가격에 파는 두리안을 사서 길거리에 선 채 남편이 (식기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손만 더럽히겠다는 희생정신으로) 두리안을 내게 먹여준 일. 같은 시장에서 밀크티를 파는 소녀가, 엄청난 양의 찻잎을 넣어 뜨겁고 진하게 우려낸 찻물에 연유와 얼음을 섞어, 비닐봉지에 담고 각잡힌 종이봉투를 씌워 밀크티를 제조해준 현장.
그리고 이른 아침, 요가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나를 삐약삐약 불러세운 고양이.
사실 그런 장면들로 충분한 것이려나, 여행이라는 게. 하나 둘 꺼내어 보니 결국 남편과 먹을 것, 그리고 고양이로 집약되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