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5세 청(중)년, 포르투갈에서 자취할 결심
퇴사하기 전 일이년부터 유튜브 시청시간이 부쩍 늘었다. 내가 구독하는 대부분의 채널은 여행이 주제인데,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일하며 여행하는 일상을 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스스로 아직은 젊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남편 몰래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몇세까지인지를 슬쩍 검색해봤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제일 많은 나이까지를 허용하는 나라도 만 35세가 최대였다. 하긴, 내 나이(만 35세)면 이미 안정적으로 경제생활을 하고 있어야 맞고, 워킹홀리데이 협정국들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 근로는 제공하기 힘들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서운했다. 나는 아직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최근에 또 '청년도약계좌'라는 제도가 생겼다고 했다. '청년'의 저축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인데, '청년'의 소득이 낮을수록, '청년'의 납입액이 많을수록 정부가 많은 금액을 지원해주는 금융상품이란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청년'은 만 34세 이하. 이미 어영부영 만 35세가 되어버린 나는 가입할 수 없었다. 아니, 나이를 그렇게 먹고 사회생활도 했으면서 아직도 나라가 돕기를 바라? 내차게 다그치는 마음의 소리1에게 마음의 소리2가 대답했다. 응, 나이를 먹었고 사회생활 경험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해.
구체적인 목적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지금 이대로 흘러간다면 영영 닿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단 멈추었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생활의 관성은 멈출 수 있었다. 나는 만 35세의 무직자였고, 머지않아 만 36세의 무직자가 될 것이었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운명처럼 만났다. 이름만 귀에 익숙한, 유명한 줄은 알아도 펼쳐 볼 생각은 한 적 없었던 책이었다. 독서모임에서 내가 책을 고를 순서가 되어 교보문고를 찾아갔던 날, 표지가 예쁜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를 집어 들다가 옆에 놓인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발견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덜컥 사 버리기엔 돈이 아까워, 서점에서는 일단 독서모임용 <언어의 무게>만 구매하고 나왔다. 그런데 <언어의 무게>가 책장에 꽂혀 있는 날이 길어지고 독서모임 날짜가 가까워 올 수록, 내가 고른 책과 그 책의 저자에 대해 좀 더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리스본행 야간열차>. 수백명은 거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책이었다. 마침 퇴사 직후였던 나는, 꿈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호들갑스럽지 않은 설레임을 충만하게 채워넣었다. 아마도 퇴사 이전의 나였더라면 그렇게까지 찌릿하게는 와닿지 않았을 법한 장면들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스위스 베른,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지나던 다리 위에서, 이제껏 당연스레 흘러온 인생이 갑자기 툭, 끊겨버리고, 포르투갈어 단어의 울림이 잡아당기는 곳을 향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타면서 시작되는 여정.
포르투갈에 가야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내면의 고막이 먹먹해질 정도로 외쳤다. 이 나라의 거리를 내 두 발로 걸어다녀보고 싶다.
에어비앤비는 한 달 장기숙박을 하면 할인이 된다. 포르투에서 한 달을 지낼까, 리스본에서 한 달을 지낼까. 고민하다, 포르투에서 오래 머물기로 했다. 그동안 TV와 유튜브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연출되었던 도시 아니던가. 리스본에서도 열흘은 있어야겠지. 마지막 남은 문제는 항공권. 무려 4개월 이후의 일정인데도 항공편은 여의치 않았다. 과거에는 리스본 직항이 있었던 것 같은데 코로나의 여파인지 찾을 수 없었다. 경유를 하고도 돈을 이렇게 많이 내야 한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퍼뜩 구세주처럼 떠오른 아시아나항공. 그동안 아시아나항공 마일리지용으로 발급받은 씨티카드의 *프리미어마일 카드를 열심히 사용해서 항공 마일리지를 꽤나 쌓아뒀다. 그런데 항공사 마일리지 좌석이란게 늘 그렇게 일찍부터 매진되는지는 차마 몰랐다.직장인 신분에 마일리지 좌석이 남아있는 날짜에 여행일정을 맞추기란, 십년 전 산 원피스에 군살 붙은 몸을 끼워넣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프리미어마일카드는 그간 단종되었고, 카드사는 개인 카드 사업 철수까지 결정했다.
그런데 나는 백수잖아? 때는 이때다! 아시아나 항공이 취항하는 12월, 1월에 좌석이 남아있는 유럽도시를 하나씩 확인했다. 그러면서 해당 도시에서 포르투나 리스본으로 이동 가능한 연결 항공편과 가격을 스카이스캐너로 확인했다. 그러자 내 눈에 가장 합리적인(싼) 플랜이 나왔다.
우선 12월 중순 출발, 1월 말 귀국하는 프랑스 파리 왕복 항공편을 마일리지로 구매한다. 파리에 도착한 당일, 여유시간 (최소 3시간) 후 환승 가능한 포르투행 항공편 (EasyJet, 위탁수하물 추가해서 92.73+42.99 EUR, 스피디보딩 옵션이 자동으로 함께 추가됨)도 예매. 포르투에서 한달을 지낸 이후에는 리스본까지 기차로 이동(2등석 프로모션 티켓 19.50 EUR)하고, 리스본에서 파리까지는 비행기(AirFrance, 위탁수하물 포함 14.7만 KRW)를 타고 간다. 파리는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이 아니고 무엇보다 숙박비가 비싸므로, 혹시나 리스본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결항할 가능성을 대비, 한국 귀국을 여유있게 준비할 수 있도록 이틀만 머문다.
예기치 않게, 12월의 포르투는 허구헌날 비가 내린단다. 그래서 비수기라고. 잠시 멈칫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좋아! 붐비지 않겠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체로 그때그때 항공권 가격이 싼 (비수기) 목적지들을 잘도 다닌 사람이다. 여행내내 비가 내리는 일도 숱하게 경험해보았다. 그래서 안다. 비가 자주 내리는 시기라도, 여행이라면 만끽할 수 있는, 그 시기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것. 대개 우기의 동남아를 자주 찾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매일 비가 내린다고 해서 모든 날 매시매분매초 비가 내리지는 않는 법이다. 언제 그랬냐는듯, 해가 쨍하게 들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가운지. 또, 폭우가 쏟아지는 날의 정취는 해가 찬란하게 비추는 날의 아름다움과는 정 반대의 요염함이 있다. 여행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드라마틱한 일들도, 대개 비 내리는 날에 발생하지 않던가.
아, 물론… ‘12월과 1월 포르투갈 날씨’를 여러번 검색해본 결과, 한달 31일간 비가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아봐두긴 했다. 누군가 '정말 한달간 하루도 안 빼놓고 비가 내리더라,' 고 했으면 단념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