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kg 여행가방 속, 세력다툼의 승자는
위탁수하물 23kg와 기내수하물 10kg. 처음엔 여행가방을 두개로 나눠 필요한 짐을 안락하게 들고 가려 했다. 포르투갈에서는 택시비가 저렴한 편이라, 공항과 기차역 이동을 모두 볼트(Bolt) 택시로 할 예정이니까. 그런데 복병은 파리. 에어비앤비 숙소 예약에서부터 뼈아프게 실감한 고물가 도시 아닌가. 그래서 파리에선 2박만 하고, 그것도 호스트와 함께 지낼 예정. 대중교통으로 시내를 이동하는 중에는 소지품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챙겨야 하니, 개복치의 유럽여행에서 여행가방 두 개는 과욕이겠지. (결국에는 파리에서도 공항-시내 이동을 볼트 택시로 했다. 유럽여행 카페를 잘 찾아보면 파리 택시 쉐어 찾기 글도 꽤 많으니 눈여겨보는게 좋겠다.)
여행가방을 한 개로 줄이고 나니, 겨울옷만으로도 가방 한쪽이 다 찼다. 아직 요가매트랑 전기요를 안 넣었는데... 한달살기를 하는 도시마다 아쉬탕가 마이솔 수련을 경험해보겠다는 요가 꿈나무의 야망과, 체온과 대사조절 기능이 떨어져 효율이 낮은 육체의 생존본능이 엎치락 뒤치락, 레슬링을 했다.
인천에서 파리 가는 비행기 OZ501, 비행시간은 14시간 25분. 기내에 준비된, 생각보다 맛이 썩 나쁘지 않은 레드와인을 한 잔씩, 세 번이나 마시며 가능한 많이 자려 애를 썼다.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후각이 발달했다면, 아마 내가 내뱉는 숨에서 미처 분해되지 못한 알코올 냄새를 맡느라 힘들지 않았을까. 뒤늦게 미안하다. 그러나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도, 두번째 식사 후부터는 더 이상 잠이 안오기 시작했다. 홍차 한 잔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기내 영화 <빛의 시네마>를 보고, 넷플릭스로 아이패드에 다운받아둔 영화 <다음 소희>를 봤다.
- <빛의 시네마>: 편협한 시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의식이 되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나이차. 힐러리가 스티븐네 엄마보다도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은데!
- <다음 소희>: 권선징악의 배신. '욱'한 소희와 태준, 유진을 따라 나의 눈물샘도 폭발하였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짜여진 동선과 절차였지만,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고 입국심사를 기다리는데만도 사십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1터미널에 내렸고, 다음 항공편은 2터미널이므로, 짐을 찾은 뒤 곧장 공항셔틀을 타고 2터미널로 이동했다.
샤를드골 2터미널에서 PP카드로 사용 가능한 라운지는 한 개뿐. 2E에 있는데, 왔다갔다 할때 보안검사를 또 해야 한다. 그런 수고를 할 만큼 좋지는 않다는 후기를 봤던 터라, 가볍게 패스했다. 대신 맥주와 잔 와인, 스낵을 파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십여년 전 샤를드골에서도 딱 여기 앉아 잔술로 화이트 와인을 마셨던 것 같은데, 기억일까 착각일까. 메뉴에서 잔으로 주문 가능한 화이트는 하나 뿐이다. 250ml에 6유로. 마셔보니 샤도네이 같다. 개인적으로 화이트 와인에서는 오크향이나 바닐라향이 무겁게 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무거운 향 없이 산뜻해서 가볍게 마시기 좋았다. 노트북을 펴고 타닥타닥, 연재를 마친 브런치북 <맘 푹 놓고 치앙마이>를 발간하기 위해 다시 한번 퇴고했다.
파리에서 포르투로 가는 EasyJet 항공권은 위탁수하물 추가를 위해 업그레이드해 두었더니, 스피디 보딩 (우선탑승) 옵션이 함께 추가되어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좀 더 냈다고 제공해주는 편의가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서럽게도 느껴진다.
짧은 비행이므로 창가석. 이번 비행의 좌석 메이트들은 포르투갈 부자(父子)였다. 긴 다리의 청소년 아들이 본의 아니게 무릎으로 내 단잠을 깨울 때마다, 본인이 더 소스라치며 다리를 움츠렸다. 포르투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부자는 창 밖의 불빛무리를 멀찌감치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기라도 한 걸까.
비행기가 멈추고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부자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더니 자리를 비켜준다. 바쁠 일 하나 없고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여행자이지만, 나가라고 하니 나가야할 것 같다. 엉거주춤 비행기 복도로 나갔다. 선반 위 가방을 꺼내려는데, 내 가방이 너무 뒤쪽으로 밀려나 있다. 닿을 리 없는 팔을 쭉 뻗는 시늉을 했더니,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내 가방을 슬며시 앞으로 밀어준다. 아니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배려가 자연스러운거야?
포르투 공항에서 에어비앤비 한달 숙소까지, 볼트(Bolt) 택시로 12.7 유로. 저렴한 택시비 덕분에 늦은밤 교통편 걱정도, 악명높은 돌언덕길에서 돌돌돌, 짐짝 끄는 수고도 덜었다. 내 방은 1층. 여긴 0층부터 시작이므로, 1층이라 쓰고 2층이라 읽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다보니, 짐을 들고 높이 올라가도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행운이다. 계단에 *센서등이 없어 핸드폰 플래쉬를 켜고 올라갔다. 계단은 좁고 가파른 편. 한 개 층을 오르는데만도 두번이나 뒤뚱, 하며 간담이 서늘했다. 드디어 문 앞에 섰는데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칠흙같이 어둡다. 키 박스의 비밀번호를 맞추자 달칵, 열쇠가 나왔다. *센서등은 없지만, 초인종인줄 알았던 문 오른쪽 작은 버튼이 조명 버튼이었다.
짜라잔잔잔. 31박에 180만원. 직전 한달살기 치앙마이 숙소가 29박에 165만원이었으니, 치앙마이보다도 더 싼 가격이다. 물론 치앙마이에서 지낸 곳이 중심지에서도 한 가운데 있기는 했지만, 이번 숙소도 만만찮게 접근성이 뛰어나다. 볼량(Bolhão)역 근처로, 볼량 시장까지 걸어서 7분. 상벤투역까지는 걸어서 14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구석구석 예쁘고 날씨도 쾌적한 도시에서 걷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으니, 20분도 안 되는 도보거리는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치앙마이 요가원에서 만난 포르투갈인이 신신당부했듯, 실내가 더 추운듯 하다. 에어컨을 켜보니 온도가 28도로 맞춰져 있다. 확실히 훈훈한 공기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별 차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물로 한바탕 샤워하고, 짐을 정리했다. 한겨울에만 입는 파자마를 꺼내 입고, 두툼한 수면양말을 신었다.
예상했겠지만, 요가매트와 전기요의 대결에서 승자는 전기요다. 등이 따수우니 근심걱정이 흐물텅 녹아내린다. 이윽고 잠이 찾아든다. 그래, 무병장수해야 요가도 오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