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우리들의 우상
응급실에서 진료 순서는 먼저 온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더 급한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응급실의 진료는 효율적이고 빠르고 최대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응급실에 체류하는 시간을 24시간으로 제한하곤 합니다.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그 시간을 넘기기도 합니다. 특히 대학병원에서는 암이나 만성질환의 악화로 인해 입원을 해야 하는 경우 24시간 넘게 대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년 차부터는 낮 당직이라고 해서 낮 시간의 응급실 업무를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그날은 제가 낮 당직을 맡은 날이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진료 의뢰가 왔습니다.
<진료 의뢰>
68세 남성. 신경과 OOO 교수님
섬망 악화로 다시 진료 의뢰드립니다.
의뢰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우리 병원의 교수님이었고 3년 전에 은퇴하셨습니다. 제가 학생 때 인자하기로 유명했던 교수님이었습니다. 실습 때 다른 교수님이 학생들을 혼내는데 그 교수님이 와서 말리는 일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시험 문제도 매년 똑같은 문제로 쉽게 내주시기로도 유명했습니다.
교수님의 상태는 분명 안 좋은데 입원을 받아 주겠다는 과가 없어서 5일째 입원 중이었습니다. 교수님을 입원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도 특정과에 입원하기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뇌졸중이 발견되면 신경과를 입원하고, 급성 심부전이면 심장내과, 급성 신부전이면 신장내과로 입원을 할 수 있을 텐데 검사 결과가 전반적으로 조금씩 안 좋긴 하지만 특정 질환이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섬망(delirium)이라고 하면 주로 노인분이 갑자기 헛소리를 하거나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치매와는 구분이 되는데, 일단 신체 질환의 악화가 원인이 되고, 인지기능의 일중 변동성과 공간이나 시간에 대한 지남력 저하가 특징적입니다. 주로 낮에는 괜찮다가 밤에 악화되고, 그럴 때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시간대인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과격해지고 흥분하는 경우, 또는 반대로 멍하고 반응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섬망은 정신과에서 협진을 보고 자문을 해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응급실에 입원한 첫날부터 매일 한, 두 번씩 섬망으로 정신과에 의뢰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공의가 교수님을 한 번씩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뢰가 될 때마다 똑같은 자문을 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협조가 되면 약을 먹이고, 안 되면 안정제 주사를 놓되 부작용을 조심하고, 무엇보다 신체 질환을 잘 치료하라'라고 복사 붙여 넣기 하듯이 똑같은 내용의 자문을 남겼습니다. 정신과에 의뢰한다고 해서 마법같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시간이 필요했고 고생은 응급실 직원들의 몫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수님을 만나러 응급실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차분한 모습으로 침대를 30도 정도 기울여서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예의를 갖춰서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정신과 전공의 2년 차 OOO입니다."
"그래요 고생이 많아요. 무슨 일이에요?"
교수님의 과격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차분하고 인자한 모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지기능이 멀쩡해 보였습니다. 의뢰되었던 내용만 봐서는 섬망이 악화된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서 루틴 하게 불필요한 진료 의뢰를 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화가 났습니다. 간단하게 진료 보고 갈 생각으로 말을 이어 갔습니다.
"아 네 교수님, 몇 가지 여쭤보고자 왔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TPP 확인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허허, 그래요. 오늘이 202x 년 x월 x일 이죠.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낮 3시쯤 된 것 같고, 여긴 내가 교수하던 병원이고요. 허허허 자네는 전공의이고."
TPP는 time, place, person의 약자로 섬망 환자에서 기본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수님에게 예를 갖춘다는 의미로 의학용어를 그대로 써서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완벽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무리 인지기능의 변동성이 있다곤 하지만 너무 멀쩡해 보였습니다. 저는 교수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의국으로 돌아와 진료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신과 협의 진료 기록>
TPP intact. organized speech. 현재로는 agitation이나 delirious feature 두드러지지 않음.
추후 악화 시에 재 의뢰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후로 교수님은 밤에도 섬망이 악화되지 않았고, 피검사나 CT, MRI에서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낮에 응급실을 퇴실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낮 12시경에 또다시 섬망이 악화되었다며 그날의 낮 당직 2년 차 전공의 동료가 진료 의뢰를 받고 갔습니다. 교수님을 보고 온 동료가 저와 상의하러 왔습니다.
"아니, 어제는 네가 써놓은 대로 정말 멀쩡했던 게 맞아? 너무 심각하던데?"
"아 그래? 어제는 정말 괜찮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인자하기까지 해서 나도 놀랐어. 오늘은 어떘길래?"
"아휴 난리도 아니었어. 막 욕하고 소리 지르고, 주사 바늘도 뽑고, 응급실 전체가 소란스러웠어. 바로 주사제 놓았지 뭐야. 근데 이상하네. 이거 섬망이 맞긴 한 건가?"
"어라, 그러게. 이거 혹시 다른거 아니야? 신경과 진료 기록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저희는 신경과 진료 기록을 확인하였습니다. 기록은 간단히만 되어 있었습니다. 신경과 교수님이었다보니 기록을 간단히 남긴 모양이었습니다.
<신경과 협의 진료 기록>
stroke (-) motor or sensory change (-)
r/o delirium do to another medical condition
신경과에서도 뇌졸중은 아니니 섬망이 의심 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순간 저희는 이전에 배웠던 루이소체 치매(lewy body dementia) 를 떠올렸습니다. 루이소체 치매는 비교적 희귀한 질환인데, 다른 치매에 비해 일찍 발병하고 인지기능의 변동성이 매우 크고, 파킨슨 병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도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동료 의사는 협의 진료 기록에 루이소체 치매도 의심을 해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 뒤로 다시 교수님은 안정을 찾았고, 응급실에서는 루이소체 치매를 확인해보기 위해 다시 신경과에 진료의뢰를 했고, 고가의 PET 검사를 시행하였습니다. 검사 결과는 루이소체 치매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왔습니다. 보호자분에게 물어보니 평소에 잠꼬대가 심한 편이었고, 교수님의 아버지가 파킨슨병과 치매로 일찍 돌아가신 가족력이 있었습니다. 루이소체 치매의 진단 기준에 부합했습니다.
루이소체 치매인 것을 알아냈지만 특별한 치료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정제 성분 중에 항정신병제는 파킨슨 증상을 악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가의 검사를 고생해서 하는 것이 진단명을 알아내는 것 외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단명을 교수님 본인에게 전달을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도 궁금했습니다.
그 뒤로 교수님은 1주일의 응급실 체류를 마치고 요양병원으로 모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들의 우상이었던 그 인자한 교수님이, 본인의 전공인 신경과의 질환에 걸리다니, 허무함과 씁쓸함이 몰려왔습니다. 루이소체 치매는 계속 진행을 하는 병이기 때문에 점점 심해 졌을 것 입니다. 우상의 무너져 내려가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교수님 곁을 지키는 배우자와 자녀분들에게 뒤를 맡기고 이제는 정말 병원을 떠나 보냈습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