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인정하기 ep.4

너 성격 문제 있어?

by 어른이

의과대학 본과 2학년 교과목 중에 정신과가 있었습니다. 정신과 수업 중에서는 성격장애 강의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교수님이 재미있게 수업을 해주신 것도 있겠지만, 수업을 듣다 보면 '어라 나도 저런데?' 하며 '나 혹시 성격장애 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때문입니다.


의대생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의대생은 처음 들어보는 질환들을 여러 가지 배웁니다. 어떤 질환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증상들 중에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있으면 그 질환에 걸렸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건강염려증(hypochondriasis)의 일종이죠.


예를 들면 갑자기 두통이 생겼는데, 혹시 내가 뇌졸중이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병의 병태생리학 즉, 병이 발생하는 기전을 배우기 때문에 건강염려증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실제 임상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자세히 알게 되면 그런 걱정은 대개 사라집니다. 저도 몇 가지 걱정했던 질환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신과 성격장애 강의에서 이런 건강염려증을 다시 느끼는 듯했습니다. '정신건강염려증'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제가 지어낸 말입니다) 정신과의 진단 기준들은 어딘가 모호했습니다. 다른 질환들은 예를 들어 'COPD는 폐기능 수치가 얼마 이하면 진단'이 같이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정신과에서 예를 들면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진단 기준 중 '다른 사람을 자주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음'이 있습니다. 이 기준을 보면 '나는 종종 남을 부러워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시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나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의대생들의 '정신건강염려증'은 다른 질환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소되는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에이, 그 정도는 누구나 그렇지' 하기도 하며, 스스로 '나 정도는 괜찮지'하며 정상화(normalization)의 과정을 거칩니다. 여전히 기준은 모호하고 주관적인 판단이 필요하지만, 이런 고민 자체가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성격장애가 의심되는 환자분과의 예진으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대학병원 정신과 외래에서는 '예진'이라고 해서 처음 오신 환자분들은 교수님 진료를 보기 전에 예비 진료를 먼저 봅니다. 다른 과더라도 예진이 있지만 제 생각에는 정신과의 예비 진료는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은 바쁘니까 외래에서 환자 면담을 20분 이상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예비 진료 때 3,40분 정도 길게 이야기하고 면담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전달드리는 것이 전공의의 역할입니다.


23세 남성이 외래 초진 내원하여 제가 예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성함과 생년월일 말씀해 주시겠어요?"


"안녕하십니까. YYMMDD XXX입니다."


"네, 교수님 뵙기 전에 예비 진료를 먼저 볼 건데 보통 3,40분 정도 걸립니다. 제가 면담한 내용을 잘 정리해서 교수님께 드리겠습니다. 혹시 오늘은 어떤 일 때문에 오셨나요?"


"아 제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학병원 정신과 외래를 찾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다음 질문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환자분이 작성해 온 초진 설문지를 괜히 들춰 보았습니다. 여러 예시 증상 중에 '강박' 하나에만 체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강박에 체크를 해주셨던데, 이건 혹시 어떤 걸까요?"


"아 제가 좀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어요. 뭐 하나 하더라도 거기서 최고가 아니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잘 된 것도 있지만."


당황스러웠습니다. 손을 계속 반복해서 씻거나, 문이 잠겼는지 몇 번씩 확인을 하는 등의 강박 증상을 기대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다시 설문지를 뒤졌습니다. 대학교 옆에 학과가 안 적혀 있었습니다. 학년은 4학년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 대학교 학과는 안 적어주셨는데 혹시 무슨 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선생님은 전공의 선생님이신가요? 의사 선생님이니까 비밀 보장이 되겠죠?"


"네 전공의입니다. 죽고 싶다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이 너무 위험해 보이지만 않는다면, 그 외에는 비밀 보장이 됩니다."


"아 제가 그런 거는 아니고요. 사실은 지금 본과 2학년 의대생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비밀은 보장되니 걱정 마세요."


같은 학교 출신은 아니었지만 의과대학생 후배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오늘 오신 게 본인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 알고 싶어서 왔다고 해주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시겠어요?"


"이번에 본과 2학년에서 정신과 수업을 들으면서 정신과에 관심이 생겼어요. 저는 제가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 있다고 생각해서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또래보다 성숙했었고 지금도 제 동기들이랑 비교하면 그래요."


"아 그렇군요. 그러면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을 확인받아보고 싶어서 오신 걸까요?"


"네 그렇죠. 정신과 교수님들은 되게 성숙하고 어떻게 보면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들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은 의미가 없고 교수님들이 저를 잘 판단해 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어떤 면이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하시는 걸까요?"


"음.. 그걸 말하자면 복잡하고 이해해 주실지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받지 않아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보통 사람들은 옆에서 누가 울거나 슬퍼하면 같이 슬퍼지잖아요? 근데 저는 영향을 받지 않아요.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니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닌 거죠. 이거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마음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솔직히 속으로 '참 재수 없다'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의 면담은 중요하지 않고 교수님과의 면담을 받아야만 한다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대충 면담하고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전이에 따라 행동하지 말자는 생각에 다음 질문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학교생활이나 일상생활, 대인관계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먼저 학교 생활은 어떤지, 공부하는데 어렵진 않은가요?"


"아 공부는 어렵지 않아요. 제가 또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의과대학 공부랑도 관련이 있는데, 저는 다른 애들이랑 다르게 공부해요. 다른 애들은 문제를 맞히려고 족보 문제를 열심히 외우지만 저는 족보를 안 봅니다. 이해를 하고 장기기억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지, 족보를 보고 잠깐 외웠다가 시험 끝나면 잊어버릴 거면 뭐 하러 공부하나요. 그렇게 해서 저는 다른 애들보다 더 똑똑해지고, 그 장기 기억들이 다 쌓여서 나중에 여러 과를 통합한 연구를 할 거예요. 10년 후면 지금 제 동기들과 저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을 거예요.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머릿속으로 의심 진단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과도한 자신감이 조증삽화 또는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조금 뜬금없지만 최근 잠은 잘 주무시나요?"


"아 네 자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주무세요?"


"음.. 한 8시간? 정도 자요. 다른 애들은 잠 줄여가면서 공부하는데 저는 충분히 잡니다."


조증삽화에 가장 특징적인 '수면 욕구 감소' 증상은 없는 듯했습니다. 이것만으로 조증삽화를 배제할 순 없지만 지금은 제 마음속에 떠오른 '재수 없음'이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니 이미 진단 기준 몇 개를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진단에서 중요한 전제 조건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증상이 병적이냐?' 다른 말로 '이 증상으로 인해 기능적 손상이 있냐?'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 의대생은 본인은 잘 지내고 있고 학교 생활도 문제가 없다고 하니 아직은 질환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분명 대인관계의 문제는 있을 것 같아 그 부분을 더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대인관계는 어떤지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몇 명 정도 있나요?"


"음.. 대인관계는 크게 문제는 없는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제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없어요. 마음을 조금 열고 얘기를 하려고 하면 다른 데 가서 안 좋게 얘기 하더라고요. 상대방이 저를 질투해서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상관없어요. 저랑 척을 지면 걔네들 손해죠."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당장 인정하긴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저의 역할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한 진단이 맞는지 확인해 가며 기록을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군요. 가족관계는 어떠신지요. 가족들과 관계는 좋은 편인가요?"


"네 저희 집은 정말 화목한 편이에요. 부모님은 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저를 자랑스러워하세요."


또다시 문제가 없다곤 했지만 저는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과거가 있진 않았을지, 그로 인해 현재에도 성공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검증된 것이 아니니 기록에 적어 두진 않았습니다.


"네 그러면 이 정도 여쭤보고 예비진료 마무리 할게요. 잘 정리해서 교수님께 전달드릴 테니 본 진료 잘 받고 가세요."


"아 네, 이게 다예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교과서에 적힌 그대로의 증상을 가진 환자분이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교수님의 진료 기록에도 r/o Narcissistic PD 가 적혀 있었습니다. 환자분이 본인의 병을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어떤 기회가 있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이번 정신과 방문이 그 기회를 열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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