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인정하기 ep.3

부모님의 정신과 입원

by 어른이

자신의 정신 질환을 인정하는 것만큼 부모님의 정신 질환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병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병이 징후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었다면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부모님의 진단되지 않은 정신 질환으로 인해 자신이 받은 피해를 생각하게 되고, 더 나은 양육을 받았다면 결핍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또는 부모님의 정신 질환을 늦게 알아차리거나 방치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죠.


또한, 자신이 그 병을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보고 배워 따라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부모님의 행동 중 싫었던 것은 반면교사 삼기도 합니다. 그것이 너무 심할 때는 균형을 잃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감정기복이 심하고 화를 자주 냈다면 자식은 감정적으로 무디고 화를 절대 안 내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글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30대 초반 남성분이 외래로 왔습니다. 외래에서 초진 설문지를 작성하고 들어왔습니다.


<초진 설문지>

주호소: 스트레스, 우울

미혼 / 회사원 / 병역필

정신과 진료 처음

신체 질환 없음

스트레스 요인: 어머니의 입원


"안녕하세요. 앉으시죠. 진료는 20분 정도 하려고 합니다. 우선 먼저 무엇 때문에 오셨는지 얘기해 주시겠요?"


"제가 요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우울증이 아닌가 걱정돼서요."


"그래요. 잘 오셨습니다.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나요?"


"네, 사실 제 어머니가 며칠 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무엇 때문에 입원하셨나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우울증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피해망상 같은 것도 있어서 조현병일 수도 있다고..."


속으로는 '아 그래서 우울증이 더 걱정이 되셨겠군요.'라는 공감을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환자분은 정신질환이 유전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으니 섣불리 해선 안될 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입원 하신 건가요?"


"네 처음이에요. 사실 이전부터 우울하셨던 거 같기는 한데 정신과 진료 안 보다가 이번에 처음 진료받으면서 입원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최근에 상태가 어떠셨나요?"


"사실 최근에 갑자기 변했다거나 한건 아닌데, 계속 우울하고 피해망상 같은 게 있으니까 이번에 입원해서 진단해 보자고 해서 입원한 거예요"


속으로는 어머니의 질환이 만성 우울증 일지 조현병일지에 대해 감별하는 질문을 더 하고 싶었지만 너무 어머니 이야기만 해선 안되니 환자분의 증상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요. 환자분은 정신과 진료가 처음이시군요. 혹시 어떤 부분이 우울증이 걱정이 되시나요?"


"제가 요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자꾸 화가 나고 잠도 잘 못 자고 식욕도 떨어졌거든요. 우울증 진단 기준 보니까 해당되는 게 좀 있는 거 같아서요. 우울증이 유전도 되나요?"


"유전이 걱정되시는군요. 사실 어느 정도 유전적인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우울증이 있다고 해서 꼭 자녀에게도 우울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사실 이번에 어머니가 우울증 진단된 게 저는 많이 충격이었거든요."


환자분은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도 궁금했으니 잘 됐다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요?"


"저희 엄마는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왜 요새 흔히 말하는 F는 아니고 완전히 T에요.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지시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사실 의사인데 최근에는 15년 정도는 일을 안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저희 어릴 때는 저희 키우면서 일도 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인가 일은 그만두시고 집에 계셨죠."


"그래요?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올해 62이에요."


"그렇군요. 꽤 젊으실 때부터 일을 그만두셨네요. 혹시 왜 그만두시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제가 중학교 때 엄마가 되게 우울해 보였던 거는 기억나요. 원래도 감정표현이 잘 없고 하시긴 했는데 그때부터 좀 더 표정이 없어지고 말수도 줄어드시고 집에만 있고 밖에를 잘 안 나가셨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이미 우울증이 있으셨던 걸 수도 있겠어요."


환자분은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에 대해 억울한 마음은 없을지, 어머니의 그런 변화가 사실은 정신 질환이었다는 사실을 늦게 알게 되어 방치하게 된 것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은 없을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물어보진 않기로 했습니다.


"그랬군요. 아까 어머니가 피해망상이 의심된다고 해주셨는데 그건 어떤 걸까요?"


"음 그거는 확실한 건 아닌데 엄마가 최근에 누가 감시하고 있는 거 같다는 얘기를 했다는 걸 그곳 의료진한테 얘기하니까 피해망상일 수 있겠다고, 그 정도만 들었어요. 그래서 조현병일 수도 있는데 두고 봐야 한다 하더라고요. 근데 조현병이 이렇게 의사까지 하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조현병인데 의사를 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답 대신 질문을 했습니다. 조현병이 맞는지 감별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음, 일단 어머니가 이전부터 그런 피해망상이 있었던 것 같으세요?"


"아 그게 피해망상인지는 몰랐는데 어렸을 때부터 약간은 지나치다 할 수 있는 피해 의식은 있었어요. 예를 들면 아빠한테 시댁 식구들한테 핍박받았다고 뭐라 하거나, 근데 아빠한테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고 제가 보기에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게 잘해주시거든요. 그리고 뭐 도둑 들 거를 걱정하는 건지 집 문 위에 걸이 있잖아요? 그거를 꼭 걸어가지고 누가 집에 들어오려 하면 안에서 엄마가 열어줘야 했어요."


들어보니 이전부터 피해망상이 있었는지는 애매한 수준이었습니다. 조현병이 있는데 의사가 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대답 대신 얘기 했습니다.


"일단 어머니가 조현병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환자분은 어머니가 이번에 입원하게 된 것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드실지 궁금합니다."


"사실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 잘 생각은 못했던 거 같아요. 아니, 생각을 안 하려고 했던 거 같기도 해요."


환자분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가가 촉촉해지고, 감정적으로 몰입하려고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얘기를 이어서 해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표현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안 될 거 같은데, 억울한 마음이 들어요. 엄마 아들로 태어난 게... 아 정말 탈룰라 같네요 하하."


환자분은 코를 한번 훌쩍이며 애써 웃으려 했지만, 눈물은 곧 떨어질 듯 보였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잘 얘기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낮은 '네' 소리만 내고 더 얘기해 주길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냥 그동안 엄마가 T 여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만약에 우울증이나 조현병이라고 하면 그게 고칠 수 있는 증상이었다는 거잖아요. 저는 엄마의 공감이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어요. 그래서 저도 공감을 잘 못하는 사람이 된 거 같아요. 공감을 해보려고 해도 잘 안 돼요. 심지어는 옛날 여자친구랑 사귀면서도 공감을 잘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환자분은 이제 울먹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면담 시간은 2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뒤에 환자가 없어서 좀 더 들어보기로 생각했습니다.


"억울해요. 저는 한 번도 엄마로부터 감정적인 서포트를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는 제가 엄마를 돌봐야 하는 거잖아요. 입원했다고 해서 갑자기 사람이 변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왜 엄마는 의사면서 자기 병은 그렇게 방치했던 건지... 주변에 병을 알아봐 준 친구도 없었을까요? 하긴 엄마는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았으니까."


환자분이 비관적인 전망, 어머니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환자분이 그런 생각에 너무 깊게 빠지기 전에 개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입원하신 뒤로는 어떤가요? 변화가 있으신가요?"


"사실 입원한 뒤로는 연락도 안 하고 있어요. 너무 원망스러워서 이제는 그냥 관여를 안 하고 싶어요. 다른 가족들이 알아서 하겠죠. 저는 아빠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편인데 그렇게 아내를 정신적으로 방치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닌가요?"


환자분과 면담을 하면서 점점 제가 불편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치료자가 환자에게 느끼는 감정, 역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고 왜 불편해졌을까요? 환자에게 느끼는 감정이 제가 이전에 다른 대상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일까요? 무언가 제 안에 원인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지만 당장 알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환자분의 곤란한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길 회피하며 면담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요?"


"아빠도 참 문제가 많아요. 아빠는 지금 대기업 임원이에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게 해 주지만, 맨날 회식이니 모임이니 하면서 집에 잘 안 들어와요. 그러니 엄마도 저 지경이 된 거겠죠. 옛날에는 그 문제로 엄청 많이 싸웠는데 언젠가부터 엄마가 포기한 거 같아요."


"그렇군요. 아버지랑 관계는 어떠신가요?"


"서먹서먹해요. 관계가 막 안 좋은 건 아닌데 대화가 별로 없고, 저희 누나랑은 조금 더 친근한 거 같은데 저랑은 어색해요."


"누나가 있으시군요. 누나랑은 사이가 어떠신가요?"


"누나랑은 친한 편인데, 그렇다고 막 연락을 자주 하지는 않아요. 근데 그냥 내적으로 친근한 느낌? 이 집안에서 그나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누나와 아빠는 지금 어머니의 입원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다들 방관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엄마가 입원할 때는 다 같이 갔지만 입원하고 나서는 저희가 할 게 별로 없어요. 폐쇄병동이니까 저희가 같이 있을 수도 없고 면회도 가봤자 문 앞에서 잠깐 보고 말거든요. 그리고 엄마도 저희가 면회 오길 별로 안 바라는 거 같아요."


"그래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번에 이야기를 좀 더 해보시죠. 3일 정도 후에 오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아, 네 선생님. 약처방은 없을까요?"


"네, 아직 어떤 질환일지, 어떤 약을 써야 할지 명확하지 않으니 다음번에 이야기해 보고 필요하면 처방하는 것으로 하죠."




면담을 마무리하고, 면담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기록 가장 아래에 '역전이 생각해 보자'라고 적어두었습니다. 그날 일과를 마무리하고 고민해 보았습니다. 역전이로 인해 중립성(neutrality)이 무너졌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립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환자의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사이에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중립적인 자세는 정신분석 상황에서 주로 활용되지만 일반적인 면담에서도 중립성을 지키는 것이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골고루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상사에게 욕을 하고 퇴사하고 싶은 충동(이드)을 느끼면서도, 그러면 안 된다고 현실적으로 조율하고자 하는 마음(자아)과 더 나아가 상사의 마음을 이해하는 이상적인 성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초자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치료자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각각에 대해 비슷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예시에서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래도 성인이면 참아야죠' -> 초자아 편 들어줌

'그래도 잘 참고 계시네요.' -> 자아 편 들어줌

'사표 내고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죠' -> 이드 편 들어줌


이렇게 판단, 칭찬, 조언을 하는 것은 중립적이지 못합니다. 사실 이런 말은 '안 하면' 되는 것이지만, 반면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하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 않더라도 하나에 대해서만 질문하는 식으로 관심이 쏠리면 그 또한 중립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환자의 이드를 외면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환자는 가족들을 비난하고 어머니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있었고, 면담에서는 주로 그런 이드가 두드러졌습니다. 반면에 '아 정말 탈룰라 같네요 하하.', '물론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게 해 주지만'와 같은 말은 부모님을 비난하면서도 부모님을 비난해선 안 된다는 자아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자아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데, '저는 아빠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감을 해보려고 해도 잘 안 돼요.'와 같은 말에서 이상적인 자아, 즉 공감을 잘하고, 가족의 정신적 어려움까지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환자분이 이드를 드러낼 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 깊게 하는 것을 계속 회피했습니다. 이드와는 거리를 두고, 자아나 초자아에 관심을 더 가지려고 했습니다. 제가 가진 초자아도 '가족을 돌보고, 공감을 잘해야 한다'는 환자분의 초자아와 결이 비슷했기 때문에 환자분이 초자아에 더 집중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지만, 자아가 현실을 조율하여 어머니를 돌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순간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환자 분과 정신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자아와 초자아를 강화하고 싶었지만, 판단하거나 방향을 제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적절한 얘기를 못하고 빙빙 돌려 주변 상황에 대한 질문만 계속했던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고, 지지적 정신치료였습니다. 환자분은 지금 우울증과 큰 스트레스 상황으로 인해 자아가 약해져 있고, 중립성을 지키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약해진 자아를 보조해줘야 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인간적으로 해라'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신분석을 처음 배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는 떠오르면 좋은 말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신분석을 처음 배울 때는 중립성이나 무의식의 해석을 무리해서 시도하다가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Do no harm'의 격언에 따라 인간적으로 하면 적어도 해는 안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을 저렇게 비난하는 것이 환자가 아니라 친구였다면 뭐라고 했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라면 '그래도 가족이잖아'를 시전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힘든 마음을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환자분이 다음에 오면 힘든 마음을 더 잘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일 후에 환자분이 내원하였습니다.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난번에 얘기를 잘 들어주셔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제가 원래 말이 별로 없는데 한번 그렇게 쏟아내고 나니까 확실히 편해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랬다니 다행입니다.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예상치 못하게 좋아졌다니 일단은 안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면담에서 제가 특별히 잘한 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좋아졌다는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일단 저희 가족이 좀 더 엄마를 챙겨주기 시작했어요. 누구보다 엄마가 가장 힘든 걸 테니까요. 다 같이 면회도 자주 가고, 전화 통화도 하루에 한 번씩 하고 있어요.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이 아빠였어요. 아빠는 엄마에 대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그랬군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잠깐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제가 너무 피해의식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큰 것 같아요. 이것도 유전이 되는 걸 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선생님이랑 얘기하고 집에 가서 곱씹어 보니까 저야말로 피해의식이 심한 것 같더라고요. 제 문제를 다 가족 탓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네 그런데 어쨌건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런 부분들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이 말을 하고선 순간 실수를 했나 싶었습니다. 긍정적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암울한 얘기를 꺼낸 것인가 싶었습니다.


"하.. 그러게요. 엄마는 아직은 그렇게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희 가족들이 그 병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공부했어요. 망상에는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말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나요? 하하."


걱정했던 것과 달리 환자분의 긍정적인 변화들이 계속 드러났습니다. 병과 치료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을 격려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렇군요. 가족분들의 역할이 예후에 중요한데, 환자분과 가족분들이 함께 잘해주고 계신 것 같아 안심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어쩌면 가족분들이 어머니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려웠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실 누가 돌아가시고 하는 것도 하는데 그걸 인정하는 게 저는 정말 어렵더라고요."


이렇게 환자분은 어머니의 병을 인정하고, 긍정적인 변화들을 이뤄냈습니다. 어떻게 좋아졌는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치프선생님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네가 환자분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비판단적으로 들어주는 경험을 하는 것 자체가 흔치 않고 충분히 값진 것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또는 환자분처럼 남에게 공감을 잘 못해준다고 느껴질 때 떠올리면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치프 선생님 감사합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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