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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봤자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들

귀찮은 일일수록 바로 해치운다

by 춤몽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시기에 식욕마저 없었던 나는, 내 끼니는 걸러도 아이 입에 뭐라도 넣어 주려 애쓰며 어미새 역할만큼은 충실히 했다. 그게 내가 짜낸 기력의 전부였다. 뒷정리와 설거지는 엄두도 못 냈다. 아이가 등교하면 침대 위에 풀썩 쓰러져 사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우울은 종종 게으름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저녁을 차리려고 몸을 일으켜 방에서 나가면 아침에 아이가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간 잠옷, 딱딱하게 마른 밥풀이 붙은 식기, 여기저기 흩어진 머리카락들이 나를 맞이했다. 그런 것들에 눈길이 닿는 순간, 손끝이 얼어붙듯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나는 다시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내가 손대지 않으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그 상태 그대로였다. 집에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었지만, 두 남자는 마치 자기들이 벗어둔 옷을 개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이 굴었다.


뒤돌아서면 고지서 정리, 가정통신문 회신, 학부모 참관수업 참석, 양가 경조사 챙기기 같은 일들이 바통을 주고받듯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이런 일들이 당연히 내 몫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미래의 나에게 현재의 업무를 떠넘기지 말 것.



못 본 척 눈을 질끈 감는다고 욕실에 낀 물때가 저절로 사라지진 않는다. 한숨 자는 사이 설거지 요정이 다녀갈 리도, 잠깐 장을 보고 오는 사이에 건조기가 스스로 바짝 마른 빨래를 꺼내 개어줄 리도 없다.


양치하다가 세면대에 물때가 보이면 락스를 뿌려두었다가 3분 후에 헹군다. 식사 후 식기는 바로 물을 받은 개수대에 담가두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위의 기름기를 행주로 닦는다. 그동안 식기에 묻은 음식물은 설거지하기 쉽게 불어있다. 건조기 종료 알림이 울리면 곧바로 옷을 꺼내 훈기를 식히고, 외출 전에는 꼭 개어 옷장에 넣는다. 피곤에 절어 집으로 돌아올 미래의 나를 위한 작은 배려다. 저녁에 주방 정리를 마무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면 내일은 쾌적한 주방에서 하루를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다.


납부 기한이 한참 남아 있더라도 주민세, 재산세, 자동차세 같은 고지서는 수령하는 즉시 납부하고, 그 일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운다. 학부모 상담이나 병원 진료 일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요일과 이른 시간대로 잡아 일찌감치 끝낸다. 양가에 안부 전화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기분 좋게 안부를 주고받으면 될 일이다.


이런 일들은 귀찮다고, 당장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후일로 미루어 봤자 끝내지 못한 숙제로 남아 마음을 짓누를 뿐이다.


눈앞의 귀찮은 일을 1순위로 처리해 두면, 미래의 나는 정돈된 공간과 마음의 여유를 선물 받게 것이다.



[참고] 어지러운 공간이 우울감을 악화시키는 방식

1. 시각적 과부하: 지저분한 환경은 뇌에 끊임없이 해야 할 일들을 상기시켜 스트레스와 불안을 증가시킵니다.

2. 통제력 상실감: 내가 내 삶을 조율하고 있다는 감각이 약해지며 무력감이 커집니다.

3. 자존감 저하: 어질러진 환경은 '나는 이것조차 못 해내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켜 자기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 환경을 정돈하면서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컵 하나 씻기, 현관에 나뒹구는 신발 짝 맞춰 줄 세우기 등 즉각적으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작은 정리부터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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