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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Jul 24. 2022

12화. 모유수유 때 남편에게 하지 못한 말

나 골룸 되어 가는 거 안 보여?

 입에서 단내가 난다.


 '우르르 까꿍', '쭈쭈 먹을 시간이네', '쉬야 해쩌염?' 같은 유아어 말고 고급 어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성인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친구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거울을 보라. '살찐 골룸'이 서 있다.

 임신 중 15kg 찐 몸은 출산과 동시에 딱 아기 몸무게만큼(4kg)밖에 안 빠졌고, 모유 수유하는 동안 뭉텅 빠진 앞머리는 이제 막 삐죽삐죽 새로 돋아 오는 중이다.


 젖이 끊임없이 차오르는 가슴을 뚝 떼어놓고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 내 모습이 살찐 골룸이어도 괜찮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가슴은 기대 이상으로 비옥했고, 아기는 2시간 반에 한 번씩 풍요의 땅에 얼굴을 묻고 배를 채워야 했다.


 1년 전에는 분명 이 시간에 맥주 한 모금에 육포 한 가닥을 질겅질겅 씹으며 VOD를 봤는데 1년 후 같은 시각, 나는 수유등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꾸벅꾸벅 졸며 젖을 물린다.


 괜찮아, 난 엄마니까.


...는 무슨!!!

 2세가 태어났는데 왜 나 혼자 부모가 된 거 같은 느낌인 것이냐!!


 남편의 동선은 '집-회사-(때때로 회식)-집' 변함이 없는데, 나는 하루 종일 '방-거실-부엌-화장실'만 맴돈다.


 남편은 배도 안 쳐지고 흑발이 풍성한데, 임신 중 여기저기 튼 내 배는 바람 빠진 풍선 같고, 두피는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다.


 남편은 내가 차려준 밥을 먹는데, 나도 내가 차려준 밥을 먹는다.


 내가 아기에게 모유수유를 하며 영양도, 생기도 잃어가는 동안 남편은 구석에서 카톡을 하며 킬킬거린다.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미안, 그땐 진심이었어) 힘차게 젖을 빠는 아이와 눈이 마주쳐 곧 사악한 마음을 거둔다.




 돌이켜보면 다 내 탓이다.


 나는 휴직으로 경제력을 잃었으나 남편은 여전히 경제 활동을 하고 있으니 살림, 육아는 온전히 내 몫임을 스스로 당연하게 생각했다.

 도움을 하면 '부족한 아내, 모자란 엄마'임을 인정하는 것 같아 다 잘 해내려고 용을 썼다.


 그러나 신생아 키우기는 부부가 함께해야 하는 일이고, 모유수유 중인 아내는 한동안 주변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상태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내가 아기를 종일 끼고 살아, 남편이 아기와 살 비벼가며 하루라도 빨리 부성애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엄마는 자식을 열 달이나 품으며 모성이 자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만, 아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기가 태어남과 동시에 부성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수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그리고 출산 후 여성에게 찾아오는 급격한 신체적, 정서적 변화를 남편이 공감해 줄 거라는 기대감과 추후에 찾아오는 실망감은 정비례하므로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초코파이 CM송일뿐이다.  이제 막 아빠가 된 남편에게는 똑똑히, 구체적으로 말을 해 줘야 한다.


 아기가 보챌 때 허리가 시큰한 나 대신 아기띠 메고 10분이라도 왔다 갔다 해달라고 했어야 한다.


 퇴근 후에라도 아들의 똥기저귀 좀 책임져 달라고 했어야 한다.


 내가 수유 중일 때는 핸드폰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당히 말했어야 한다.


 결과물이 '짜장 국'일지언정 일요일엔 남편에게 짜파게티라도 하나 끓여 달라고 했어야 한다.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진 남편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성은 경험치가 쌓여야 형성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밤잠을 쪼개가며 '우리'의 2세에게 을 먹이는 아내를 위해 남편은 이 정도쯤이야 기꺼이 해 줬을 것이다.

 다만, 내가 먼저 요청하지 않았고, 육아의 고됨을 '말하지 않아도 알기'를, '눈치껏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마저도 욕심일지도.


 그대가 회식하는 그 시간에 아이에게 젖을 물린 아내가 '무알코올 맥주라도 마실까?'라고 갈등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참말로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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