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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Oct 18. 2022

14화. 한살림과 세븐일레븐

너를 위한 건강식과 나를 위한 위로식

 출산 6개월 후 복직한 나는 가까운 동료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아있다. 휴직 기간 동안 미치게 그리웠던 '성인과의 대화'와 '술'이 함께하는 자리다.

 나와 잔을 부딪치는 동료 A는 출산 후에 뭉텅 빠지고 나서 잡초처럼 새로 돋아나는 내 앞머리를 보고 '*김무스'라고 놀린다. 지금 '김무스'니 '골룸'이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갈증으로 아우성치는 체내 세포들을 위해 부지런히 알코올을 나른다. 아이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친정엄마께는 죄송하지만 아주 가끔 이런 일탈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속도를 내야 한다.

*김무스: 90년대에 활동한 배우이자 가수.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주목받았다.


 너무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 취기로 한껏 끌어올린 활력으로 아기를 돌본다.

 

 '우루루루 까꿍.'


 24시간 붙어있을 땐 모르겠더니 떨어져 있다가 만나니 왜 이리도 반갑고 애틋한지. 역시 연애에도 육아에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복직 초반에는 일과 육아를 균형 있게 잘할 줄 알았다. 일도 즐기고, 가끔 술자리도 참석하고, 아이에게 양질의 이유식과 편안한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슈퍼우먼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백일의 기적'이 우리 아이를 피해 갔다. 아이는 1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통잠을 자지 않았다. 새벽에 두세 번씩 깨서 30분씩 자지러지게 울며 온 집안을 뒤흔들어 놓고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아이와 함께 나의 수면 패턴도 형편없이 망가졌다.

 만성 피로 상태로 직장에 나가 업무 및 회의, 잔무 등을 끝내고 나면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 동료와의 술자리고 나발이고 동굴로 들어가 긴 겨울잠을 자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아니, 근처 모텔에라도 가서 반나절 늘어지게 자고 나오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백일의 기적: 두세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는 신생아가 태어난 지 백일쯤 지나면 기적처럼 새 깨지 않고 통잠을 잔다는 뜻.


 '가야지.. 다시 집으로 출근해야지...'


 마음을 고쳐먹고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고 있을 아기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아, 그전에 먼저 들를 곳이 몇 군데 있다.

 친환경 유기농 먹거리를 판매하는 '한살림'에 들러 아기 이유식 재료를 사야 한다. 오늘 들어온 싱싱한 시금치, 핏기가 선명한 최상급 한우, 무항생제 동물복지 유정란 등을 장바구니에 담아 들고 나온다. 또각또각또각 하이힐 굽소리가 다급하게 향한 다음 목적지는 '세븐일레븐'. 여기서의 구입 품목은 단 하나이므로 한치 망설임 없이 '수입 맥주 네 캔 만 원'이라고 쓰인 냉장고 문을 연다. 

 오늘은 칭다오, 하이네켄, 스텔라, 칼스버그 너희들로 정했어.    


 이렇게 아기를 위한 무해한 건강식과 나를 위한 유해한 위로식으로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 돌아오는 날이 수년 째 계속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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