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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Oct 20. 2022

16화. 방전된 육아맘의 은밀한(?) 충전법

엄마 주유소 좀 다녀올게

 아직 분리불안과 등원 거부가 해소되지 않았고, 예민하고 까다로운 기질인 우리 아이를 어린이집에 몇 시간쯤 보내는 게 적당할까.


 퇴사를 했더라도 온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은 체력적, 심리적으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하루 3시간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기로 했다. 그 사이 집안을 쓸고 닦고, 세탁기를 돌린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그 시각, 나는 며칠 전에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국을 데워 밥을 말아먹는다. 이제 막 한숨 돌리려고 시계를 올려다보면 어김없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다.


 하원한 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터로 향한다. 우리 집 아파트는 단지가 작아 놀이터엔 미끄럼틀 하나 덩그러니 있지만, 네 살 된 아이와 뛰어놀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네 살 아이의 뜀박질이라고 절대 얕보면 안 된다. 서른 후반이었던 나는 아이를 따라 손바닥만 한 놀이터 두 바퀴만 돌아도 목구멍에서 왈칵 신물이 나왔다. 기구 위에 올라간 아이가 혹여 발을 잘못 디뎌 다치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 지켜보는 데 쓰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한 시간쯤 놀다 집으로 돌아오면 10분이라도 죽은 듯이 누워 있고 싶지만,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퍼즐판을 가지고 나와 거실 바닥에 흩뜨리고는 말한다.


 "이거 엄마랑 나랑 같이 해."


 같은 시간 깨어있어도 배터리는 각자의 나이만큼 닳는지 아이의 에너지는 아직 짱짱하다.


 "대단하다.. 너는 낮잠도 안 자니..? 조금만 기다려 줘. 엄마 기름 좀 넣고."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로 가는 게 당연하듯 나는 이 타이밍에 냉장고 을 열어 맥주를 한 캔 따서 위장을 채운다. 물론 노란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없게 하얀색 특대형 머그컵에 옮겨 붓는다.

 맥주 한 모금에 퍼즐 한 조각을 맞춘다. 시간이 지날수록 퍼즐판은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지고 방전되었던 나도 점차 활기를 찾는다. 알코올로 흥을 끌어올려 아이와 소꿉놀이도 하고 로봇 놀이도 하고 막춤도 춘다.


 '헉, 헉' 숨을 고르며 시계를 본다. 아무래도 시계가 고장 난 것 같아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만 단 1분의 오차도 없다. 믿을 수 없어 창밖을 본다.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다. 어스름하긴커녕 아주 쨍쨍하다. 이제 네 시밖에 안 됐다.

 알코올 주유는 그다지 연비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캔을 딴다.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데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아이에게 '뽀로로'를 틀어주고 나는 늦은 낮잠에 빠진다. 우렁각시가 12첩 반상을 차려주는 달콤한 꿈을 꾼다.





 

 퇴사하기 전에 나는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 모성애를 아이에게 바칠 각오를 했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림과 달리, 맥 주 몇 캔과 30분의 조각 잠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육아맘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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