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 이야기 3 - 과학의 달

by 서유정

어느 날, 문득 규창이가 물었다.

“너 혹시 C.A.(클럽 활동) 뭐 들을 거니?”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과학 실험 반.”

규창이가 놀란 듯이 말했다. “어, 영어 듣기 반 왜 안 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 영어 안 좋아해.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영어야.”

그 짧은 대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오래도록 그가 던진 질문을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영어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일까. 사실 영어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 단지 영어 시간 후에 녹음기를 옮길 때마다 남학생들이 복도에 나와 쳐다보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난 연예인은 못할 것 같다. 내 몸을 쳐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 시간들이 나를 점점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올해만큼은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었다.

1학년, 2학년 모두 영어 독해 반을 했던 나는 처음으로 과학 실험 반에 지원했다. 실은 망설임이 컸다. 가보니 여학생이 거의 없었고, 눈에 띄는 건 남학생들 사이의 장난기 어린 웃음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물상 선생님이 계셨고,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배려해 주셨다.

“여학생들끼리 한 조 짜줄게.”

그 한마디에 나는 안도했다. 그렇게 여학생 넷이 한 조가 되었다.


4월은 과학의 달이었다.

물상 선생님께서 우리 클럽 모두 자연사 박물관으로 견학을 간다고 하셨다. 이 주일 후, 클럽활동 시작 전에 점심 먹고 운동장에 모여 바로 출발을 했다. 말로만 듣던 자연사 박물관을 본다니 기대가 많이 되었다. 선생님 말씀이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은 정말 볼만하니 나중에 꼭 가보라고 하셨다. 우리가 가는 곳은 대학교 부설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견학 당일. 햇살은 따사로웠고, 하늘은 조금 흐렸지만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대학교 부설 자연사 박물관으로 가는 길. 한 시간을 넘게 서울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이었다. 버스 안은 시끄럽고, 멀미는 점점 깊어졌으며, 나는 어지러움 속에서 바깥 풍경에 집중하려 애썼다.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박물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넓고 어두운 전시장 안에 흩어지는 조명들, 반짝이는 유리장 속 유물들, 천천히 흐르는 공기의 결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박물관에서 나오신 선생님 설명을 들으면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역사관도 보고, 여러 동물의 화석도 보고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었다. 동물 표본도 많이 있었다. 발자국 화석, 고래의 척추뼈, 기묘한 뿔을 가진 짐승들. 나는 거의 숨을 멈춘 채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나비가 특히 많았는데 어떤 분이 평생 모으신 것을 기증하신 거라고 했다. 작은 날개에 붉은 점, 푸른 줄무늬, 황금빛 테두리가 있는 나비들이 유리장 안에 정렬되어 있었다. 누군가 평생을 바쳐 모은 수집품이라고 했다. 마치 기증하신 분의 고요한 집 안 거실에 들어온 것 같았다. 먼지 한 톨 없는 유리 케이스, 손수건을 깔고 조심스럽게 옮기는 나비 날개, 그 섬세한 열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다음 방은 파충류 방. 어두운 조명, 희미하게 반사되는 유리벽, 그리고 그 안에서 또렷하게 움직이는 그림자들. 나는 문턱을 넘기 전부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냥 박제야… 살아있는 게 아니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들어섰지만, 첫 번째 유리관 앞에서 나는 그만 멈춰 섰다.

뱀이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마치 지금이라도 유리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삼켰다. 온몸이 식기 시작했고, 손끝이 저려왔다. 발이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고, 어둠이 덮쳐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뿌연 시야 속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졌다.

“괜찮니?”

“괜찮아?”

“정신이 드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순간, 뜨거운 것이 눈가에서 터졌다. 참으려 했지만, 왈칵 쏟아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당황한 선생님이 내 어깨를 다독였고, 친구들은 조용히 내 곁을 지켜주었다. 견학은 그렇게 끝났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 나는 차창에 이마를 기대고 멍하니 흔들리는 도시 풍경을 바라보았다.

...

교무실 앞. 물상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누가 민희네 집 알아?”

“네, 저요. 제가 데려다 줄게요.”

낯익은 목소리. 고개를 들자 규창이었다.

‘쟤가 우리 집을 어떻게 알지?’

놀랐지만, 지금은 따지고 물을 기운조차 없었다. 규창이는 내 책가방을 들어줬고, 우리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20분쯤 걸리는 거리. 나는 자꾸만 헛구역질이 났고, 규창이는 묵묵히 내 속도를 맞추며 곁에서 걸었다.

겨우겨우 집에 와서 초인종을 눌렀다.

“여기야? 괜찮은 거야? 너 지금 얼굴이 너무 하얘.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대문이 열리고 엄마가 나왔다. 나는 금방 토할 것 같아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차례 토한 후, 겨우 숨을 돌리고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왜 남학생이 집까지 오니? 도대체 누구니?”

“최규창. 같은 클럽이야, 내가 아파서 데려다 준거야. 나 쟤 이름밖에 몰라.”

“그러니까 남학생 이름을 네가 왜 아냐고? 그리고 다른 애들은 없어? ”

“엄마는 내가 괜찮은 것보다 그 남학생 이름이 더 중요해?”

“동네 사람들이 보고 뭐라 그러겠니? 다 큰 계집애가 남자를 데리고 다니면.”

“데리고 다닌 거 아니야. 개가 따라온 거지.”

“그러니까 왜 따라와.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 절대 안 따라가.”

그 말에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그런가? 나한테 관심 있냐고 물어볼까? 아니 엄마의 그 말로 내가 더 규창이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날 밤 꿈자리에 자연사 박물관 뱀들이 우리 집까지 따라왔고 나는 소리소리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정말 뱀까지 나한테 관심이 있었나 보다. 땀범벅, 눈물범벅이 되었고 우황청심환을 먹고 겨우 잠이 들었다. 결국 다음 날 학교 결석을 했고 우리 엄마도 더 이상 그 사건 관련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그렇게, 나의 견학, 첫 실신, 그리고 아마도 처음으로 남자를 집으로 데려온 사건이 지나갔다. 그날 이후, 규창이는 단지 같은 영어 듣기 반 친구가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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