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수업 시간 끝나고 녹음기 옮기기 프로젝트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영어 선생님, 나, 윤선이, 녹음기 이동, 이 루틴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바꾸어 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녹음기가 박살 난 그날, 마치 시간도 함께 조각난 듯했다. 아이들의 장난, 흔들린 책상, 떨어진 기계.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고였지만, 그 이후의 나날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윤선이 말로는 2반 앞에서 친구와 이야기하는 동안 책상 위에 잠깐 올려두었는데 남학생 둘이 몸싸움을 하다 책상을 밀쳤고 결국 녹음기가 박살이 났다는 것이었다.
녹음기가 떨어지면서 테이프 꽂는 부분이 분해가 되고 테이프를 꽂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담당 선생님들까지 알게 되셨고 관련 학생 모두 교무실로 불려 가서 엄청 혼났다. 학교에 영어 선생님이 여덟 분이나 계셨고 매번 영어 시간에 랩 실을 갈 수도 없어서 영어 시간의 녹음기는 필수 수업 교구였다. 우리들이 녹음기 값을 물어내지는 않았지만 반성문을 삼일 동안 썼다.
일주일 후에 새 녹음기가 도착했고 선생님께 바뀐 시스템에 대하여 들었다. 영어 수업 후에 각반 반장이 옮기고 반드시 핸드 인 핸드, 즉 직접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1반 반장에게 일주일에 두 번 녹음기 전달을 해야 하고, 10반에서 1반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아! 정말 싫었다. 누가 쳐다보는 것도 싫은데 남자아이들이 우글거리는 복도를 지나가야 하다니.... 드디어 내가 녹음기를 옮기는 날이 되었다. 6반까지는 잘 갔는데 5반을 지나가면서 남자아이들이 하나둘 내 모습을 보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미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내 심장은 녹음기보다 무거웠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얼굴이 붉어졌고, 교실 문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나 자신을 숨기고 싶어졌다.
“야~ 얜 또 뭐야? 뉴 페이스네. 예쁜데.”
남학생 두 명이 서로 밀치면서 내 앞에 쓰러지고 서너 명은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4반 앞인데 되돌아갈 수도 없고 나는 울고 싶었다. 그때 정말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하늘에서 나타난 슈퍼맨처럼. 쓰러져 나뒹구는 아이들을 일으켜서 보내주고 내 녹음기를 손에서 빼서 건네 쥐었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너 1반 가지? 조용히 내 옆에서 걸어. 앞만 보고 걸어.”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그 아이 하라는 대로 했다. 드디어 그 웬수 같은 1반 앞에 왔다.
“1반 반장이 누구니?”
“응, 나야. 최규창.”
그제 서야 나는 찬찬히 이 남학생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도 키가 큰 편인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피부가 약간 검은 편이고 군살이 없어 전체적으로 운동선수 같은 느낌이었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눈빛이 깊고 차분하게 빛나서 얼굴은 철학자 같았다. 수염 없는 나쓰메 소세키 얼굴이었다. 그 당시 내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있는 중이라 책 앞부분에 그 사람 사진이 있었다. 똑같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비숫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규창이를 처음 보았다. 아니, 이전에도 몇 번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날 그는 내 시야 속으로, 내 마음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쓰러지는 아이들 틈에서 조용히 나를 보호하듯 나타난 규창이. 그의 손에 녹음기를 넘기던 순간, 내 마음의 어딘가가 대책 없이 기대고 있었다.
어쨌든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마쳤기 때문에 돌아가려고 했다. 돌아서는 순간, 내 차라리 단테와 지옥을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계단으로 내려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시 4층 계단을 올라가면 시간이 너무 걸렸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한 발씩 걷고 있는데 아까처럼 쳐다보긴 해도 내 앞에 쓰러지는 장난꾸러기들은 없었다. 내 옆에 규창이가 같이 걷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옆에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면서, 더 느린 속도로 머리를 굴리면서 6반 앞까지 왔다.
“나, 간다!”
규창이는 돌아가고 이제는 여자애들이 우르르 나와서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윤선이가 내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야, 재 뭐야? 너 괜찮아? 내가 갈걸. 어휴, 내가 죽일 년이다.”
다음 날 아침, 조금 일찍 등교를 하게 되었다. 영어 랩 실은 아직 잠겨 있었다. 복도 앞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규창이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다.
“어제 많이 놀랐지? 애들이 다 착한데 여학생만 보면 그렇게 난리야.”
“너 여기 왜 있어?”
“나도 너랑 같은 영어 듣기 반이야. 너무 섭섭한데. 내가 눈에 안 띌 수가 없는데.”
내가 늘 앞자리에 앉아서 뒤에 앉는 남학생들을 미처 못 알아본 것이다.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너 혹시, 영어 수업 전에 5반 앞에 서 있으면 어떠니? 내가 너한테 5반 앞에서 녹음기를 전달하면 되잖아. 1반까지 갈 필요 없이.”
“음...”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싫어. 내가 좀 바쁘거든. 그리고 분명히 1반에 녹음기 가져다 놓는 게 네가 할 일이잖아.”
“아니, 너 어차피 5반 앞까지 걸어오잖아.”
“매일 5반 앞에 내가 왜 가야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너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날, 나 교무실 내려가느라 중앙계단으로 간 거야. 너 때문이 아니고. 그냥 우연인 거지.”
다시 말해서 일주일에 두 번은 이 이상한 일을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하필 우리 영어 선생님 수업이 10반 다음에 1반이라니. 여름방학까지는 4개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다음 영어 수업 후에 5반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규창이가 나타났다. 녹음기를 주려고 하니 팔이 아파서 못 든단다. 남학생들은 역시 구경난 것처럼 복도에 죽 나와서 쳐다보고 있었다.
“야, 뭐냐? 니네 둘이 사귀냐? 최규창 재주 좋네.”
“닥쳐! 맞고 싶지 않으면.”
전에 맞은 적이 있는지, 아니면 위협적인 태도에 주눅이 들었는지, 큰 목소리에 놀랐는지 복도에 있던 조무래기들이 싹 없어졌다. 나야말로 너무 놀라서 이 남학생에게 더 이상 쓸데없는 부탁은 안 하기로 생각했다. 1반 교탁 앞에 녹음기를 놓고 나오는데 역시 규창이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너 팔 아프다며?”
“응, 발은 안 아파.”
처음엔 이상한 일도 자꾸 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부드럽게 흐르면서도, 단단한 벽처럼 일상을 구획 지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다시 녹음기를 옮기게 되었고, 규창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루 중 가장 긴장된 순간에 등장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복도는 여전히 길었고, 남자아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규창이가 내 옆에서 걸을 때면 그런 불편함이 조금은 옅어졌다. 그 뒤로 5반부터 1반까지, 다시 1반에서 5반까지 같이 걷는, 이상한 남학생과 나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규창이는 말수가 많지는 않았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대신 짧은 눈빛과 동작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곤 했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어느새 그것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란히 복도를 걸을 때면,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외침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그날 이후, 그는 늘 그런 식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심하게, 그러나 결코 무관심하지 않은 태도로. 내가 느끼는 작은 공포, 떨림, 그리고 설렘을 그는 알고 있는 듯했고, 그래서 더욱 아무 말 없이 곁을 내주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의 그림자를 기다렸다. 복도 끝에서 보이는 키 큰 실루엣, 깊고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말없이 걷는 걸음. 그 모든 것이 내 하루를 이루는 풍경이 되었고, 나는 그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루틴은 더 명확해졌다. 녹음기를 옮기는 길, 복도 끝에서의 짧은 대화,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감정의 잔상들. 누군가는 그것을 ‘첫사랑’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단어조차 너무 부담스러워서 조심스럽게 서랍 속 어딘가에 그를 숨겨두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