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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향 Galadriel Dec 29. 2021

고백

제 것이 아니어서 무거웠던지

아름드리 소나무 제 팔을 부러트려

쌓인 눈을 터는 밤에


나도 무서워서

무거운 것들을 털어 

봅니다


먼지 같은 존재라 떠들면서

먼지라 여긴 적 없고

영혼을 채워달라 노래하면서

곡간을 채워달라 간구했고

사랑이 유일한 길이다 나팔 불고는

사랑에 인색했던 


어깻죽지 툭 꺾어 보여 주신 

위선의 ….


(시작노트라 하기엔 너무 긴 시작노트)


견디기 힘들 정도의 겨울 추위나 여름의 폭염도 없는 축복받은 땅 밴쿠버가 폭설과 한파로 몸살을 앓습니다. 지난밤엔 영하 15도라는 기록적인 추위와 폭설로 곳곳에 나무가 부러지고 정전사태가 속출했다 합니다. 오래된 주택과 건물은 히터가 작동되지 않아 밤새 추위에 떨었다는 소식에 마음까지 얼어붙습니다.


듣고 보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오늘 아침, 얼어붙었던 내 얼굴과 어깨 근육이 활짝 웃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겨드랑이에 날개를 숨긴 지인이 보내주신 팥죽 한 냄비와 비트를 썰어 넣고 담근 동치미 한통의 힘이었지요. 내가 웃으면서, 움츠렸던 육신에 뜨거운 피가 다시 돌기 시작했는지 식욕이 솟아올랐습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팥죽과 시원한 동치미로 근사한 아침을 먹고 설거지도 가볍게 해 치웠습니다. 내가 웃지 않았다니, 내가 죽 한 그릇 제대로 먹지 않았다니....  그동안 어깨 통증으로 외출도 집안일도 못하고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스리슬쩍 우울증이 찾아들었던 모양입니다. 내친김에 무기력해진 몸과 마음에 신선한 공기도 선물하고 운동도 할 겸 집 근처 숲으로 산책을 나갔지요. 


산책로엔 소나무 자작나무 굴참나무가 바람 한 점 없는 눈 속에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아무도 지나간 적 없고 새 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을 걷다 보니 아름드리 소나무 미끈한 가지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 부러져 있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들 수 있는 것만 들어야 하고 제 것이 아닌 것은 털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요. 알고도 행하지 않는 나를 살리시려고 급기야 '내 날갯죽지를 꺾어 멈추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시는구나' 생각했지요. 아프게 배우고 감사하게 눈뜨는 겨울, 많이 춥고 힘들지만 오늘 밤, 또다시 눈이 내린다면 나는 축복이라 여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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