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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Mar 26. 2023

스물다섯, 폭식증 그리고 우울증 #2

극야의 시작

 극지방에 가까운 지역에는 특이한 현상이 존재한다. 여름에는 해가지지 않는 백야가,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시작된다. 극야에는 해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어스름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빛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어둠에 익숙해지면, 내가 온몸으로 느꼈던 햇빛은 내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진다.


 나의 극야의 시작을 똑똑히 기억한다. 스물둘, 2020년 여름. 극야에는 어울리지 않은 화창하고 무더운 여름, 내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생각되던 때이다. 가장 아름다웠음에도 스스로를 혐오했던 시기. 당시의 나는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쉽게 실망하고 좌절했으며, 더 나은 삶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시의 나는 체중을 감량하고 있었다. 나는 원래 175cm, 84kg의 거구였다. 3년간 그 몸무게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해서, 나에게 ‘체중감량’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나를 비추어보았기 때문에. 나를 비추는 거울에서 나는 늘 가치 없는 존재였다. 뚱뚱하고, 공부도 못하고, 하등 잘하는 것 없는 그런 존재 말이다. 하찮은 나의 존재 때문에 같은 극의 자석처럼 사람들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아름다워진다면 나의 가치가 증명될 테니. 내가 다른 극의 자석으로 바뀌면 사람들이 다가오겠지 하는 바람으로. 이것이 바로 혹독한 체중감량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 사진들을 SNS에 자랑하듯 전시했다. “나는 이만큼 적게 먹는다.”, “나는 이렇게 건강한 음식만 먹는다.” 뽐내듯이. 하루라도 업로드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까 두려웠다. “역시 네가 성공할리 없지.”, “내가 뭐랬어. 뚱뚱한 사람은 변할 수 없어.”라는 말들이 내 귓속에서 윙윙 맴돌았다. 타인의 시선이 이토록 두려웠다.


 그리고는 내가 섭취하는 음식의 양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매 순간 저울을 들고 다니며 음식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쌀은 70g만 먹어야 하며, 지방이 많은 고기는 100g만. 하루 섭취 칼로리는 나의 기초대사량보다 낮은 1400kcal. 조금이라도 초과하면 너무나 불안해서 잠들 수 없었다. 매일 두 시간, 세 시간씩 운동을 해도 불안해서 잠들지 못할 때면, 집 근처 산에 올라갔다 오거나 한강 주변을 걷다 오곤 했다. 또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음식 생각에 새벽에 잠들기도 하고, 3시간 정도 자고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아침을 챙겨 먹었다.


 이런 생활은 나를 체지방 17% 언저리의 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 숫자를 보면 행복했지만, 난 아직도 나를 비추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미웠다. 왜 아직도 복근이 선명하지 않은지, 볼살은 왜 빠지지 않는지.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음에도 마른 체형을 타고난 사람들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아 서러웠다. 그들은 나의 이러한 노력 없이도 충분히 예쁜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도 못생긴 것인지. 길에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절망했다. 무언가에 막혀 영원히 닿을 수 없게 된 것만 같았다.


 절망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난 전부 놓아버렸다. 하지만 전부를 놓아버림으로써 변하는 나의 몸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체지방이 증가하고, 무기력해졌다. 운동도 그만두었고, 일주일 중 거의 매일을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빛이 사라져 가는 겨울 언저리에, 나 혼자만의 극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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