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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Mar 30. 2023

스물다섯, 폭식증 그리고 우울증 #3

소복한 눈 아래에

펑펑 내린 눈은 영하의 날씨에서 고스란히 바닥에 쌓인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면 하얗고 보드라운 빵 같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하지만 그 밑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두툼한 눈 밑의 무언가의 실체를 상상할 뿐이다. 기온이 올라가 눈이 서서히 녹고 나서야 우리는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그제야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극야 속의 나는 눈사람이었다. 두터운 눈으로 덮여 아무도 나를 들여다볼 수 없었기에. 아무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난 마치 은둔자처럼 집이라는 동굴에서 나가지 않았다. 나 스스로 조차 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어찌나 스스로를 숨겼던지, 거울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간혹 거울을 마주하면 눈을 재빨리 피했지만, 얼핏 들여다본 거울 속의 뚱뚱하고 잔뜩 부어있는 나의 얼굴은, 며칠이나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되풀이되고, 나는 나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었다.



값싼 물건을 사면 험하게 다루듯, 가치가 낮은 것은 그렇게 다루어지기 마련이다. 값이 매겨지는 물건과 달리 우리 인간은 어떻게 가치가 매겨지는 것일까. 가치를 정하는 것은 나인가, 타인인가. 그 ‘가치’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내가 매긴 나의 가치는 동전 하나만도 못했다. 아름다움이 곧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했기에, 그 당시에 아름답지 않은 나는 하등 가치 없는 생명체였다. 내가 매긴 가치에만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다른 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 스스로 정해버렸다. 뚱뚱하고 잘하는 것 하나 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귀를 닫아버린 나는 어떤 긍정의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북풍과 태양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다가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정했다. 먼저 북풍은 거세게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그네는 옷을 단단히 여몄고, 북풍은 더 세게 공격했다. 바람이 더욱 불자 불편해진 나그네는 옷을 더 껴입어버렸다.
이윽고 태양의 차례가 되었다. 먼저 태양은 적당히 빛을 비추었다. 그랬더니 나그네는 껴입었던 옷을 벗었다. 태양이 더 강하게 광선을 내리쬐자 나그네는 더위를 참을 수가 없어 근처 강가로 가서 목욕을 하기 위해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 북풍과 태양/이솝우화

 

 이솝우화에서 태양이 바람을 이겼다고 했던가. 마치 달이 동주기자전을 하듯이, 나의 가족과 나의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피하려고 해도 눌 나만을 바라보며 따뜻한 말을 스스럼없이 걸어왔다. 그들의 따뜻함은 나그네인 나에게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따뜻함은 나의 내면의 차가운 바람을 이기고, 나를 덮은 그 많은 눈덩이를 녹아내리게 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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