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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Apr 17. 2023

스물다섯, 그리고 연애 #1

침엽수, 한결같이 당신을

가시처럼 가느다란 이파리를 잔뜩 달고 멀대 같은 키를 자랑하는 침엽수는 핀란드 전역을 뒤덮고 있다. 해 한번 나지 않는 겨울에도 늘 같은 색을 띠고 있어, 하얀 눈밭을 푸르게 장식해 준다. 우리는 침엽수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누군가와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가장 먼저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대화가 재미있고,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즐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 갈망의 끝에서 우리는 ‘약속’을 한다. 서로를 연인으로 부르기로.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뇌는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두뇌를 지배하던 이성은 온전히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갈증만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나 또한 이와 같다. 상대에게 헌신하고 싶었고, 평생 함께하고 싶을 만큼 당신이 좋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한결같겠다는 약속 같은 것 말이다.

 연인관계에서 항상성이 존재할까. 우리는 서로에게 늘 같을 수 있을까. 과연 나 자신의 상황을 배제하고, 온전히 상대방에게 동일한 감정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인간보다는 로봇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삶에는 언제나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이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 변수는 사랑이라는 공식에서 수시로 바뀌며 ‘사랑’의 출력값을 다르게 도출하게 한다.

 사랑의 출력값은 다양한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을 향한 마음, 나의 여유, 나의 기분 등이 변수가 될 수 있겠다. 변수는 외부요인으로 인해 증감될 수 있고, 이는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영역일 때도 있다. 그러면 이제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 이에 굴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굴복하고자 하면 연인관계는 끝을 맞이할 것이고, 유지하고자 하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는 당신 홀로가 아니라 연인의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지치고 좌절할 수 있다. 또는 연인이 당신의 손을 놓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서로의 삶에서 지켜낼 수 있을까. 탈진 직전의 상황에서 어떻게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늘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까.


I need somebody who can love me at my worst
나의 최악의 순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해.
No, I'm not perfect, but I hope you see my worth
나는 완벽하지 않아, 그래도 네가 나의 가치를 볼 수 있길 바라.
‘Cause it's only you, nobody new, I put you first
다름 아니라 너니까. 난 네가 최우선이야.
And for you, girl, I swear I'll do the worst
난 너에게 뭐든 해줄 거라고 약속할게.

"At My Worst" Pink Sweat$



 최악의 순간을 서로 견뎌줄 수 있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결혼’에 가깝겠다. 부모님의 관계를 보면, 서로가 아프면 언제나 곁에 있어주고,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선뜻 손을 내민다. 말 그대로 ‘동반자’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그러나 연인의 관계는 그와는 다르다. 한 명이라도 손을 놓으면 끝나는 관계이기에, 얇고 부서지기 쉬운 관계에 가깝다. 타인이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가. 나는 성인이 되고서야 나의 가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물며 삶을 함께 하지 않아 온 연인이라는 관계는, 더 얄팍하고 불투명함에 틀림없다. 삶의 변수는 살얼음이라는 우리의 관계에 돌을 던지는 격이다. 우리는 크게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깨진 우리가 다시 붙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너는 날 뒤흔들고
내 우주를 조종해
흐트러진 중력에
힘을 빼앗긴 채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것만 같아

“뭔가 잘못됐어” 권진아



 한없이 얄팍한 관계이지만 우리는 삶에서 그 어느 것보다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때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낸 사람이기에 우리는 서로 닮아간다. 삶이라는 책에서 처음에는 몇 단어, 그다음에는 몇 줄, 그다음에는 몇 페이지를 공유하게 된다. 우리의 삶의 일부에서 지워질 수 없는, 영원한 글자로 남는다.

 이 얄팍한 관계는, 얄궂게도 나를 참 아프게 하기도 했다. 당신의 사랑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느끼면, 마치 내 마음이 갈리는 것과 같이 아프다. 길을 걷다 문득 눈물이 나기도 하고, 일상에서 당신의 생각만 하기도 하며, 입을 열면 당신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그럼에도 당신의 사랑이 닳아버렸기에 한없이 기다린다. 다시 채워지기를. 하지만 다시 채워지고 나면 너무 늦었을 때도 있었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 마음을 닫았으니. 더 이상 당신에게 바라고 기대하지 않게 된다. 하루 종일 기다리던 연락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되며, 당신과의 데이트를 고대하지 않게 되며, 당신과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돌아오면 이런 나의 모습에 실망만 하고 만다.

 상대가 한결같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이렇게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상대를 놓아도 되는 걸까.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 당신이 무심한 것인지. 내가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인지, 당신이 이기적인 것인지. 수치로 나타나 채점하듯 판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오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픈 이 시간이 지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제발 나를 홀로 두지 않기를.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리며, 시계만 멍하니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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