볶은 콩

주는 행복

by 인해 한광일

도시 아파트에서 사는 아이들은, 더욱이 이젠 시골에 할머니 댁을 둔 아이들이 많지 않은 현실에선, 제비를 가까이 본 아이는 거의 없을성 싶다. 처마가 없는 아파트에선 더욱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릴 적 기억인데도 명료하다. 새끼 제비들이 입을 벌리고 요란하게 재재거리면 어미 제비가 무엇인가 먹이를 물고 왔다는 얘기다. 어미 제비가 물고 온 것을 그 노란 입 속에 넣어주고 다시 날아가던, 부지런하고 수고스럽던 모습은 흔한 장면이었다. 어미 제비가 처마 밑에서 새끼를 먹이는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린 시절, 제비집을 올려다보며 제비로부터도 나는 틀림없이 무언가를 가슴으로 배웠을 것이다.


흥부전과는 머리털만큼의 상관도 없는 관람기(觀覽記)다. 어미 없는 제비 둥지란 아이들의 옹송그린 두 손보다도 비좁아 네댓 마리의 솜털 뭉치들이 서로 불편을 참느라 늘 꼼지락거렸다. 벌거숭이 새끼들은 몸싸움은 치열했을지언정 먹을 게 아니면 침묵 덩이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도 제 어미 기척을 용케도 알아본 새끼 제비들은 그 순간 온통 벌린 입만으로 된 시끄러운 생물이 된다. 시나브로 둥지 가득 넘칠 듯 자라서 아직 솜털 투성이지만 외견상으론 제 어미보다 크게 부풀려진 녀석들이 아직도 노란 나리꽃 입을 벌리고 먹이를 재촉한다. 그렇게 쉼 없는 어미 새의 노고가 애틋하지만, 아기새들의 어린양이며, 둥지 가득 피어난 고 샛노란 입들이란…. 제 새끼 입으로 먹을 것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던가. 어미 제비들의 마음도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가 보았다. 주는 이가 더 행복한 게 맞는가 보았다.


몇 해 전부터 교실을 나와 주로 교무실에서 근무하게 되다 보니, 큰 재미 하나를 잃게 되었다. 사람을 잃는 것이야말로 큰 손실이라더니, 관리자로 옮겨 앉다 보니 교실과 학생들을 잃게 된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는 선생님들의 수고로운 모습이 가끔 정말이지 멋지게 보이곤 한다. 가끔 아이들이 어쨌는데 그게 얼마나 기특해 보였는지 모르겠다는 둥 수다를 쏟아 놓고 나가던가, 땀 젖은 이마를 쓸어 넘기며 냉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 선생님의 목울대에서 열강의 잔류흔(殘留痕)을 느낀다. 교실은 이제 추억일 뿐이니 내 정신적인 작용은 그저 5, 6년 전의 비교적 가까운 추억을 소환할 뿐이다.


아이들이 새끼 제비들처럼 보채는 통에 또 콩을 볶았다. 아니, 실은 아이들의, 콩 한 알에 햇살 같이 피어나는 얼굴이 좋아서 볶았다. 6학년이나 된 아이들이 하마만큼이나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콩을 재촉하는 모습이란 좀 징그러운(?) 데가 있지만, 새끼 제비의 그 모습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러나 조금 치사했지만 콩은 그저 주어지는 어미 제비의 사랑과는 좀 달랐다. 콩은 대가였다. 흔히들 다른 선생님들이 나누어 주는 칭찬과 격려에 다름 아니었다.


주택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 중심지에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한밤중에 학교 운동장을 돌며 걷기 운동을 즐겼다. 그리고 더 늦은 시간엔 배움이 지겨운 교복 입은 학생들도 잠입하듯 스며들곤 했었다. 새날이 눈 뜬 이른 아침. 너른 운동장 여기저기엔 피지 않아도 될 쓰레기 꽃이 언제나 흐드러져 있었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을 재촉하여 제멋대로 핀 쓰레기 꽃을, 내 뒤를 졸졸 따르며 집게로 줍곤 했다. 이들의 이른 아침 봉사의 대가는 그들이 보채던 그 몇 알의 달가운 콩알이었다. 볶은 콩알을 바라는 아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이젠 제비 둥지의 새끼들처럼 재재거리며 쓰레기 꽃들을 휩쓸어오니 금세 운동장이 맑아지곤 했다.


콩알을 한 줌 움켜쥐고 뒷짐을 진다. 아이의 연필은 이제 학습지 끝단을 달리는 중이다. 집중력은 곧 칭찬을 받는다. 슬그머니 다가가 학습지 위에 우르르 콩알을 쏟아 놓는다. 옆자리의 아이에게도 콩알 한 줌을 놓는다. 다리 다친 친구의 가방을 들고 등교했던 그 아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이다. 아이들이 모두 웅성거린다. 나는 다시 콩알을 담은 그릇을 들고 아이들 입에 일일이 콩알을 물어 나른다. 오늘은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본 기념으로 모두에게 선물을 주노라며, 아름다운 아이를 친구들에게 높세운다.


샘이 많은 아이가 저도 엄마를 졸랐는지 볶은 콩이 주머니 가득이다. 친구들과 나누느라 하루 종일 부산스럽다. 나는 내 콩 단지 뚜껑을 덮는다. 아이의 콩알이 온종일 반을 술렁이게 하고 몇 알은 교실 바닥을 굴러다닌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곧 다시 내 콩에 눈길을 붙인다. 나는 아이들에게 비싸게 굴며 콩을 아낀다.


볶은 콩은 나의 창안물이 아니다. 선생님들 사이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칭찬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내게 볶은 콩은 마치 나만의 창안물인 것처럼 재미나고 요긴하다. 한없이 주고 또 주어도 별로 잘 줄어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이것을 아끼고 또 아끼며 인색하게 군다. 얼마든지 흔한 것이 우리 교실에선 귀하고 귀중하다.


아이들은 내게 콩을 빼앗아 먹는 재미가 그만인가 보다. 발표가 멋졌으니 그 친구 콩을 좀 주시는 게 좋겠단다. 어제 늦게까지 청소하던 자길 도왔으니 그 친구에게 콩을 좀 나눠주면 안 되겠느냐며, 원래 제 콩인 양 선심 좀 쓰자 한다. 그러나 나는 어이없게도 겨우 콩 네 알을 꺼내며, 네 명의 조원들이 함께 나누어 먹으라 한다. 아이들의 야유와 아쉬움이 찐득하지만 다른 조의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군침이다. 4명씩 혹은 6명씩 구성한 조는 흡사 제비 둥지와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은 콩 단지를 앞세운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새끼 제비들의 벌린 입처럼 두 손을 콩잎처럼 펼쳐 들고 아우성이다.


한 학부모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이는 집에선 거들떠보지도 않는 콩인데, 집에만 오면 콩 이야기란다. 별난 콩이 냔다. 한 알 깨물어 보곤 고개를 갸웃거리시며 돌아간다. 별날 것도 없으니 그럴 법하다. 그 어머니는 결코 내 콩의 별난 맛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콩 맛이 미각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날이라서’ 라며 내 멋대로 이름 지은 날, 아이들은 누구나 콩을 한 줌씩 얻어먹을 수 있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무슨 축복이라도 받은 양 주체할 수 없는 환호로 행복은 교실 밖으로까지 넘쳐난다. 이처럼 우리 반에서 콩 단백질은 행복감 유발물질로서 기능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둥지를 넘치게 자라면 그들도 새끼 제비들처럼 둥지를 나설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나선 뒤의 풍경이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새끼들이 이소(離騷)한 빈 둥지를 보는 어미 제비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졸업식의 맛은 그래서 카페라테 같은, 6학년 담임 선생님만 아는, 부드럽고 대견한 고적(孤寂)감이다.

볶은 콩은 아몬드의, 아몬드는 볶은 콩의 대용물이다. 볶은 콩과 아몬드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던 버릇이었다. 그걸 못 해본 지 좀 되는 세월이라 그런지, 가끔 교무실을 드나드는 선생님의 손에 들린 교재가 부럽곤 한다.





개밥그릇이 엎어져 있다



내린 비가 다 마르고

낙엽 구르는 가을


다람쥐는

먹고 남는 도토리를

감출 수 있다


개밥그릇이 엎어져 있고

그릇 주변으로 흩어진 개사료를

개가 핥아먹는다


배가 불룩한 개구리들이

겨울을 나려 산골 고인물로

갈빛을 하고 모여든다


개밥그릇 속에 든

개사료를 생각하며 개가

엎어진 그릇의 겉을 핥다 끙끙거린다


온몸 푸르도록 여름을 먹은 풀무치

아랫배를 불룩거리며

숨을 쉰다


엎어진 개밥그릇이 튕겨내는

햇빛을 흘끔거리다가

배를 깔고 턱을 괸 채

개 한 마리 우울증을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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