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갈이의 고통이 아담에게 주어진 죄과라면 산고는 이브의 죗값이란다. 그런데 문명이 지금처럼 발달하다 보니 우리는 남자들도 여자들도 원죄의 고통을 많이 벗고 사는 현대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남자들의 밭 가는 고통은 이미 트랙터와 트럭, 자동차에 넘겨주어 버린 지 오래다. 여자들의 산통도 요즘엔 적잖이 회피되기도, 아예 외면되기도 한다. 제왕절개는 물론이고 다양한 무통분만술의 발달이 어느 정도 여자들을 산통에서 구원하고 있다면, 또 어떤 부부들은 출산하지 않음으로써 산통을 회피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여자들이 신이 내린 형벌(?)을 스스로 감면하거나 혹은 외면하기도 하면서 자유의지를 드높이 세우는 중이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아직 온전히 벗어내지 못한 멍에가 있다. 현대의 남자와 여자는 선남선녀로 만나 선한 부부로 살아간다. 부부로서 서로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살면서도 그들 중 대부분은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그들의 견고한 사랑을 시험대에 올려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명절증후군이라 한다. 여자들이 온전히 벗어내지 못했다는 멍에는 바로 명절증후군 그것이다. 명절증후군은 종종 산통 못지않게 많은 여자들의 목구멍에서 비명을 뽑아내곤 하는가 보다.
명절 증후군은 지금껏 남자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명절증후군은 우리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는 강력한 증거로 남아있다. 그러나 추세로 보아 그 멍에 또한 여자의 목덜미에서 벗어지거나 남자와 함께 나눠지면서 가벼워질 것이 충분히 예상되고 있다. 이제 여자들은 아름다움과 자유의지와 당당한 주체로서의 개성적 존재로 승화될 것이다. 남녀평등 시대의 남자들은, 오히려 적지 않은 남자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자신에게도 장착해 보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화장하는 남자들이 이미 어색하지 않다. 남자의 옷에도 꽃무늬를 올리기 시작한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여자가 부러운 적은 별로 없었다.
TV에는 언제나 꽃보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꽃보다 더 많이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아름다워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제 도시의 어느 거리를 걷더라도 TV 속의 여자들만큼 아름다운 여자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띄곤 한다. 그러나 나의 눈은 여자들의 의상에 있지 않다. 아름다운 의상의 여자들의 자태가 아름답고 화려하여 감탄할지언정 여자들의 의상이 부럽지는 않다.
어머니의 손등이 나무껍질처럼 거칠다. 이브의 원죄 값인 산고와 육아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신 4남매의 어머니이시다. 거기다가 자주 몸이 아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담의 노동까지 겪어 내시느라 태양과 바람에 참 많이도 시달린 탓이다. 어머니의 고난이 손등을 지나 팔뚝까지 거칠다. 아담의 고통은 어깨까지 검게 그을렀다. 아마 온몸이 그렇게 늙으셨으리라. 목주름이 안타깝게 야위었다. 몸속 뼈들이 휘고 가늘어졌을 것이다. 손가락과 무릎 관절이 닳았으리라. 낡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어깨며 등도 그렇게 늙으셨으리라.
어머니를 볼 때마다 자꾸만 휘어가는 안짱다리와 검버섯이 올라앉는 피부가 안타까워 어머니를 통째로 씻어드리고 싶다. 아킬레스가 태어난 잠겼다던 먼 그리스 신화 속 스틱스 강에 모시고 가서 노곤한 세월을 씻어드리고 싶다.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에야 따뜻한 광천수로 어머니의 거친 어깨라도 한번 밀어드리고 싶다. 여동생이며 누나는 종종 목욕탕이며 찜질방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곤 할 때마다 부러웠었다. 내가 여자가 부러웠던 유일한 순간은 그때였을 것이다.
나는 결코 여자가 되고 싶다거나 여자가 부럽지 않다. 그런데 애처로운 어머니의 손을 보기만 하면 등도 어깨도 저렇게 늙으셨을 것이므로 한 번만은 여자가 되어도 보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 않나 싶다. 따뜻한 물로 등까지 끼친 세월을 지워드리는 딸이 되고 싶었지 싶다.
까치밥
감나무 가지에
남겨 둔 홍시
사람들이 모두
까치밥이라는 데도
딱새는
못 들은 척
콕, 콕, 콕
콕, 콕, 콕
눈치 하나
안 보고
콕, 콕, 콕
콕, 콕,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