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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Aug 08. 2021

비누의 귀환



10년 만에 처음으로 비누를 샀다.


그것도 그토록 지겨웠던 ‘오이 비누.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항상 오이 비누 내지는 살구 비누를 썼었다. 손을 씻거나 몸을 닦을 때 비누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바디워시’와 ‘핸드워시’에 눈을 뜨면서 비누는 불편하고 촌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펌핑만 하면 내용물이 깔끔하게 나오는 바디워시와는 달리 비누는 원하는 양의 거품을 얻기 위해 비비고 비비고 또 비벼야 했다. 온갖 사람이 함께 비벼대는 것도 싫었고 비누에 말라붙은 거품과 머리카락도 비위생적으로 보였다. 혼자 자취를 하기 시작한 후로는 본격적으로 바디워시 사랑이 시작되었다. 바디워시는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비누보다 편하고 위생적이고 예쁘고 향기도 좋았기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여러 제품을 사용했었다.


그러던 내가 다시 비누를 사게  이유는 
남편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편과 결혼한 후로 바디워시도 공유하게 되었는데 혼자 쓸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빠르게 줄어든다는 것을 느꼈다. 대용량 바디워시를 혼자 쓸 땐 6개월~1년 정도는 썼던 것 같은데 남편과 함께 쓰니 2-3개월마다 한 번씩 대용량 바디워시가 사라졌다.


사실 새 바디워시를 사야 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가 계속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즈음, 펌핑 용기는 스프링과 같은 부속품들이 들어 있어 개인이 분해하기도 힘들고 분해하지 않으면 재활용이 불가해 일반쓰레기로 버려진다는 기사를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바디워시 좀 아껴 쓰라고 말하는 것도 좀 치사한 것 같아서 고민하던 중 문득 비누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남편도 내 의견에 동의를 해주었고 우리는 함께 마트에 가서 비누를 구매했다. 특별히 남편에게 비누향을 고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오이 비누를 집어 들었다. 상큼한 듯 비릿한 오이 비누 냄새를 10년 만에 다시 맡게 될 줄이야.


집에 와서 비누 포장을 사락 벗기고 트레이에 올려놓으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오이의 향기가 어린 시절 우리 집을 떠올리게 했다. 이 비누를 다 쓸 때 즈음이면 비누만 사라지고 플라스틱 용기는 전혀 배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버린 건 오직 비누를 감싸고 있던 비닐과 작은 종이 박스뿐. 바디워시를 펌핑하는 편리함은 그립지만 거대한 플라스틱 용기를 보며 느꼈던 죄책감에서 해방된 것 같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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