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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Mar 14. 2024

그림을 그리는 시간

 만화를 좋아하고 낙서를 좋아하는 아이였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가끔 문화센터나 동네 미술학원에 다니곤 했다. 홀로 틀어박혀 완성작을 그릴 정도의 재능과 기술은 없지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휴직을 맞이해 정말 오랜만에 미술학원에 다시 등록했다.


 지금 다니는 미술학원은 체인이 아니라 독립 학원인데 규모가 아주 작지는 않고, 원장선생님이 편안하게 취미반을 진행한다. 어쩔 때는 나 혼자, 사람이 많을 땐 6명까지 수업에 오는데 공통적으로 따르는 커리큘럼은 없다. 선생님이 붙어 서서 지도하는 게 아니라 매번 작품 시작 시 주제나 재료를 같이 의논하고, 작업하면서 세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조언하거나 터치해 주시는데 그 외에는 각자 알아서 그린다. 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민화, 색연필화, 연필 소묘 등 재료도 각자 다르고 캔버스 사이즈도 다르고 주제도 다르다. 처음에는 무슨 주제를, 무슨 기법으로, 어떤 사이즈로 그려야 할지에 대한 감이 없어서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서 정했는데 서너 개쯤 작품을 완성하고 나자 '그려보고 싶은 그림'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학원에 간 첫날 내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물어보셨는데,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고 동화에 들어가는 일러스트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아름답고, 때로 환상적이며, 색채가 아름다운 그림. 그 뒤로 실제 그림을 그릴 땐 처음의 대답과 상관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에 맞춰 주제를 정했지만 '나는 뭘 그리고 싶지?'라고 생각해 본 그 시간과 그에 대해 오래지 않아 내놓을 수 있었던 답이 마음에 들었다. 맞아, 나는 그런 그림을 좋아하지-라고 새삼 깨달았다.



 헤아려보니 벌써 9개월째 다니고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가고 애 방학 때는 쉬고 한 작품을 몇 주씩 그리다 보니 완성한 그림은 아주 작은 그림을 포함해서 6장뿐이다(복직 전에 총 8장이 될 예정이다.).


 학원에 간 첫 날은 A4 사이즈 정도의 아주 작은 캔버스에 달이 비치는 잔잔한 밤바다를 그렸다. 크기도 작고, 금세 마르는 아크릴화라서 그날 바로 완성했다. 오랜만에 그리는 거라 학원에 등록하면서도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첫 수업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작고 쉬운 소품을 그리도록 선생님이 가이드하시는 것 같다. 밤바다, 아크릴, 3호.

 

 두 번째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모작이었는데, 이 그림은 그리는 내내 원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결과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풀의 모양새, 그림자, 길의 경계, 산의 색채, 나무의 어둠 같은 것들이 잘 이해가 안 됐다. 텍스트를 이해하듯이 그림을 이해할 순 없고, 당연히 화가의 작품을 내가 온전히 따라 그릴 수는 없지만 무엇을 담고 무엇을 생략할지, 이 그림에서 무엇을 취해야 할지가 유난히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그렇다. 이해하지 못하면 내 것으로 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다가 그 작품 제목이 뭐였는지 보려고 구글 이미지 검색을 해봤으나 끝까지 페이지를 넘겨도 나오지 않는다. 에드워드 호퍼 모작(제목 모름), 아크릴, 6호.

 

세 번째, 네 번째는 모두 수채화로 그린 꽃그림이다. 수채화를 정말 오랜만에 그려봤는데, 색채에 그라데이션을 주고, 과감하게 명암을 주고, 연필 밑그림이 수채화에 녹아들게 두는 일련의 과정들이 내가 잘 모르던 수채화의 지평을 넓혀주어 재미있었다. 목련/붓꽃, 수채화, 도화지.


  다섯 번째는 인터넷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준비한 사진을 그림으로 옮겼다. 올해 여름에 다녀온 발리의 하늘과 바다와 햇살과 그야말로 무구한 우리집 어린이가 담긴 내 맘에 쏙 드는 사진이었다. 내가 그 찬란한 햇빛이나 큰 파도 없이도 다이내믹한 바다, 힘차게 뻗은 아이의 발끝에서 느껴지는 들썩이는 흥 같은 것을 제대로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풍경을 둘러싼 나의 추억과 사랑이 나중에 봐도 (적어도 나에게는) 느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그린 그림을 벽에 걸었다. 여름의 추억, 유화, 20호.


 여섯 번째는 아주 어두운 배경에 하얀 파도가 솟아오르는 흑백사진 같은 그림이다. 배경은 언뜻 보면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블랙 한 색상이 아니라 프러시안 블루, 번트움버, 퍼플을 섞어서 채워 넣은 것이다. 물결의 하얀색에도 징크 화이트와 티타늄 화이트가 섞여 들어갔다. 그림을 그릴 땐 색을 섞는 것, 그 색을 또다시 만들어내는 것, 색과 색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뭉개는 것, 과감하게 대비되는 색을 얹는 것 등등 색을 둘러싼 작업이 많다. 마음에 드는 색이 나오면 캔버스 위에 입혀진 그 물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양감이 느껴진다. 어둠 속의 파도, 유화, 20호.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불규칙한 다각형이 캔버스를 꽉 채운다. 아이가 방과후 과학시간에 배워온 '보르노이 다이어그램'이라는 것을 보고 새로운 스타일을 그려보고 싶어서 선택했다. 평면에 여러 개의 점을 찍고, 가까운 점끼리 연결하고, 그 연결된 선을 수직으로 이등분하고, 그 수직이등분선들을 이어주면 불규칙한 도형들로 구성된 다이어그램이 그려진다는 아주 심플한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려보니 생각처럼 도형이 착착 나오지가 않아서 적당히 가감하며 그렸다. 이런 작업을 할 때면, 곧이곧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적당히 가감하는' 면이 나의 주요한 한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좋게 보면 과한 힘을 들이지 않고 원하는 바를 수행할 수 있으나, 나쁘게 보면 완성도가 떨어지며 정밀한 작업은 잘 해내지 못한다. 분야에 무관하게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는 점이 언제까지나 나의 약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가가 될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 삽화라도 그려줄 것도 아니고, 어디 올려서 자랑할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그 시간 자체의 평화와 만족감만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는 약간의 자책과, 왜 여가마저 생산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반감과, 오롯한 집중이 주는 지극한 만족감이 모두 느껴진다. 좀 더 나라는 사람의 생각, 나의 구상, 나의 느낌을 담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도록 이 취미생활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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