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일 (D-14)
앞날은 막막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K 교수님도 계시고, 펠로우도 있으니 하루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며 나의 심경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우리 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글로 적어주겠다던 그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당시 그토록 눈물이 났던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렸다. 내용은 생각났지만 더 이상 눈물은 나지 않았다. 결국 그 글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어 정말 돈을 아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늘 하나님께 이야기를 해 왔다. 머릿속에서 아주 소소한 것들을 하나님께 조잘거리는 것이다. 내 영혼이 완전히 깜깜했던 그때도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을 쉬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하나님께 매일 따지고 화내고 억울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중에 한 음성을 듣게 되면서 영혼의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혼의 회복 이후에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물질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돈은 이전보다 더 없는데도 마음은 이전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늘 물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 갖고 싶었기 때문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염려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돈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영혼에 만족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항상 고급스러운 카멜 코트를 하나 가지고 싶었는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기대치 않은 곳에서 카멜 코트를 아주 싸게 사게 되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너 이거 필요하지?’하시면서 그냥 주시는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물건을 사기 전에 기도를 하기로 했다. 쇼핑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꼭 필요한 물건만 사게 해 주시고, 좋은 물건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놀랍게도 이후엔 별로 필요한 것이 없었고, 어쩌다 사게 되는 물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고 딱 맞는 것들이었다. 그 마음 그대로 앞으로 다시는 물욕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귀국 후 학회도 가고 강의도 다니니 내 안의 물욕이 꿈틀꿈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카멜 코트도 있고, 검은색 코트도 있다. 그런데 아직 겨울이 시작하기도 전에 가지고 있는 코트를 입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나에게 아직 없는 코트만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다.
‘하나님, 카멜 코트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회색 코트가 없는데 회색 코트도 하나 주시며 안돼요? 회색 코트 사도 돼요?’
그래서 나는 처음 우리 딸의 질문에 대한 대답,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내 안에 어떻게든 쇼핑할 궁리나 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글을 어떻게 쓰겠나 싶었다.
그리고 사실 바쁘게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다음 해 학회에 가려면 초록 마감일도 다가오고, 미국에서 실험한 자료들로 논문도 써야 했다. 무엇보다도 혼자서 무너진 내분비내과도 어떻게든 세워내야 했다.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12월 12일에 그 해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면, 글을 쓰기 위해 비워 두었던 그 시간에 초록을 작성하고 논문을 쓰기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하나님, 지금은 저희 과와 병원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우선이죠? 상황이 이런데 제 본업에 충실한 것이 맞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제가 어떻게 감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어요. ’
‘하나님, 저희 아이에게는 다음에 제가 잘 설명해 줄게요. 혹시 제가 좀 더 나이가 들고, 좀 더 여유가 생기고, 좀 더 하나님 깊이 알게 되면 그때 쓸게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