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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제안

2023년 12월 9일 (D-5)

by 김부경
김교수 혼자 절대 못해요

그 주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일터에서는 상한 마음을 수습하고, 펠로우 선생님마저 떠나면 나 혼자 어떻게 할지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병원 로비에서 현재 병원장님이시자 그 당시 기획조정실장님이셨던 최종순 교수님을 만났다.

“김교수, 과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네, 교수님, 내년에 저 혼자 남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교수님은 나 혼자서는 절대 못한다고 어떻게든 펠로우 선생을 잡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미 마음을 수습했기 때문에

“교수님, 괜찮아요. 어떻게든 해보죠, 뭐…”

라고 했다.

“김교수 혼자 절대 못해요. 내가 무조건 그 친구가 원하는 조건을 맞춰 줄게.”

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주에 기획조정실장님의 도움으로 우리 펠로우 선생님이 임상조교수로 병원에 남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병원 로비에서 교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쩔 뻔했나 아찔하다.

J양의 입원

그 주엔 또 J양의 첫 번째 입원이 있었다. J양도 S양을 수술한 내 후배 교수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너무 믿음직스러운 선생님을 소개해 주어 마음이 든든하다고 했다. J양은 임파선 전이가 있어 항암치료를 6차례 받고 수술을 받기로 하였다. 우리는 J양이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기 전에 J양의 공인중개사 합격을 축하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또 우리 집으로 초대를 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면 잘 못 먹을 테니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주고 싶었다. 여전히 건강한 요리를 잘할 줄 모르는 나는 최선을 다해 찜닭과, 샐러드를 만들었다. 우리는 J양의 머리카락이 아직 길고 풍성할 때를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너무 예쁜 우리 친구, 씩씩하고 용감한 내 친구가 자랑스럽다.


브리지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12월 9일은 대한비만학회의 Obesity winter 학술대회가 있었던 날이다. 그날의 강의는 요즘 아주 뜨거운 관심의 대상인 새로운 비만 약제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직 한국에서 판매되지는 않고 있는 약제인데, 감사하게도 미국 연수기간 중에 이 약제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의 실험 결과를 국내에서 처음 발표하는 것이라 나에게는 수많은 강의들 중에서 무척 기대되고 설레는 강의였다. 그래서 그날은 무척 행복한 기분이었다. 병원에 남아주기로 한 펠로우 선생님에게 무척 고맙기도 했다. 사실 우리 펠로우 선생님은 레지던트 때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아 의사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몸짱이다. 그래서 그날 그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요즘 등 운동이 좀 필요할 것 같아. 무슨 운동하면 되는지 나도 좀 알려줘요.”

그때 즈음 오른쪽 등, 어깨와 팔에 묵직함을 느껴왔는데, 내가 운동을 하지 않아서 등 근육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목디스크 때문에 조금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목통증과 오른쪽 팔이 저린 증상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근 골격계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평소 내 몸은 연체동물처럼 근육이 허약하긴 했으니까 말이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임원 모임이 있었는데, 대체로 나는 아이들의 엄마라서 얼굴만 비추고 일찍 돌아온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끝까지 남아있으리라고 작정을 하고 갔었다. 아주 늦은 밤 마지막까지 남은 대여섯 명이 24시간 설렁탕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대한비만학회 이사장님이신 PC 교수님께서 무척 나의 사정을 걱정해 주셨다.

“김부경 선생님, 혼자서 어떻게 해요?”

“괜찮습니다. 한 몇 년만 버티면 제 밑에 누군가 들어오겠죠. 뭐. 하고 싶은 게 많긴 한데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안 그만두고 버티는 게 목표예요.”

“그 몇 년 동안 브리지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혹시 내 은사님께 여쭤볼까요? 지금 은퇴하시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는데, 이전보다 훨씬 건강하시고 머리도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좋으셔서 아마 잘하실 거예요. 그리고 전혀 나이 들었다고 힘들게 하실 분이 아니에요.”

사실 나는 그저 내 사정을 이처럼 이해해 주고, 걱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했다.

그런데 그게 되겠어요?

그다음 주 첫날부터 나는 그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말씀해 주신 PS 교수님은 대한당뇨병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당뇨병학회에서는 너무나 유명하신 분이지만, 나는 당뇨병학회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한림의대에서 교수생활을 하시고, 강북삼성병원에서 은퇴하셨다. 은퇴 후 5년 동안 병원 일을 더 하시다가 3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연세가 많으시기도 하시지만 부산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신 분이다. 만약에 오신다고 하면 당장 계실 거처부터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일단 현재 내과 총무인 우리 남편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연배가 높으신 교수님의 의견도 여쭈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병원장님과 기획조정실장님께 의견을 여쭤보면서, 혹시 교수님이 오시게 되면 지내실 수 있는 집을 구해주실 수 있는지와 계약조건을 상의하였다.


여러 가지 의견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한 말이 이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되겠어요? 그분이 오시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부산과는 1도 연고가 없고, 지금 한국에 계신 것도 아니고 미국에 살고 계신 분이 여기를 왜 오실까? 한 번도 얼굴도 뵌 적이 없는 분이 말이다. PC 교수님께 메일을 드리면서도 사실 그분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진심 어린 걱정과 제안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답변을 드렸다.


그리고 12월 12일은 마침내 나의 강의스케줄이 끝나는 날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다짐을 했다. 이왕 비워둔 시간에는 연구와 논문에 집중해 보리라, 초록도 열심히 써서 국제 학회도 가리라, 정말 멋진 교수가 되리라, 그래서 나를 보는 레지던트와 학생들이 내분비내과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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