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D+1)
금요일 오전 진료를 보는데, 점점 더 가슴에 통증이 심해졌다. 외래 간호사님께 유방외과에 초음파 촬영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주 월요일로 예약이 되었다. 오전에 외래를 마치고, 다학제 진료가 두 명이나 있었다. 둘 다 너무 어려운 증례라 여러 교수님들과 많은 논의를 나누었다.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교수님들과 논의한 내용을 설명해 주는데, 오른쪽 가슴에 불덩이를 올려둔 것 같이 활활 타는 듯 아팠다.
그리고 그날은 12월 말에 떠나시는 K 교수님의 송별회가 있는 날이었다. 감사패와 꽃다발과 상품권을 챙기고 나니, 오후 4시가 넘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아프기도 하고, 마침 아픈 곳이 옷을 벗지 않아도 초음파를 댈만한 곳이라서 내가 직접 보기로 했다. 혼자 갑상선초음파실에서 초음파를 켜고 가슴에 대 보았다.
가슴이 쿵! 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갑상선 암과 유방암은 초음파 소견이 거의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영상의학과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유방암 환자들이 유방 검사를 하면서 갑상선 암까지 같이 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금까지 갑상선 암을 수도 없이 진단해 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암이다.
‘아… 망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곧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음 순간 든 생각은 ‘언니와 동생이 드디어 예수님 만나겠구나.’였다. 내 동생과 언니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죽게 생겼는데, 누나가 죽어가는데, 죽으면서 소원이 예수님 만나는 거라는데, 그걸 안 들어주겠나 싶었다.
다음 순간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 믿음이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최근에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영혼의 회복을 얻으면서 나는 나의 기쁨의 근원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에서 아무 일 없이 좋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살아서 그런 것이었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사실 그전에는 직장 일도 힘들었지만 집안에 정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다. 그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아무리 기도해도 나한테는 어려움만 주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내 인생은 예수님 믿는데 왜 이렇게 힘들고 버겁기만 하냐고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내 영혼이 회복된 것은 내 형편이 살 만해서 그랬던 것이라면, 이제 내가 뜻하지 않은 죽음 앞에서 이전에 어려울 때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때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설마 내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구도 나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했다. 나는 넘어지고 내 믿음은 흔들릴 수 있어도, 그때에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시고 붙잡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한 손으로 초음파 프루브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유방외과 교수님께 보내드렸다. 제발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다. ‘통증이 있는 것 보니까 그냥 염증이다’하길 바랐다. 가끔 갑상선도 진짜 암이다 싶었는데, 아주 가끔 찐득한 액체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도 그냥 고름덩어리이길 바랐다.
유방외과 교수님의 첫마디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엑스레이 유방촬영(mammography)을 찍으라고 하셨다. 이미 금요일 오후 5시가 넘은 터라 검사실에 환자가 아무도 없어 바로 촬영을 하였다. 이전에 없었던 석회화가 유방 전반에 쫙 깔려 있었다. 사진을 보신 교수님은
“아… 그런데, 다 해결방법이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이건 거의 확정적인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거의 30분 이내에 일어났다. 연구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계속 눈물이 흘렀다. 조금 있다가 K 교수님의 송별회를 가야 하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정신 차려 이제 나가야 돼.’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K 교수님의 송별회를 가야 되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다.
이 많은 환자들과 이 병원과 학교는 어떻게 하나 싶었다. 오늘 K교수님 송별회를 하고, 다음주가 지나면 이제 이 병원에 내분비내과 교수는 나 한 명인데, 나까지 없어지면 여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나님 이게 뭐예요? 제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이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겠네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 알아서 하시겠지 싶었다. 하나님이 사람도 뽑으시겠다 싶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을 때는 너무 무거워서 힘들고 막막했는데, 어차피 내가 절대 못한다 생각하니 가벼워졌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게 내 병원도 아닌데, 이게 내 학교도 아닌데 내가 뭐라고 그렇게 애태웠나 싶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슬펐다. 마음이 아려왔다.
‘만약에 내가 아프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내 인생은 여러 가지로 정말 한 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사실 내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지금처럼 누구도 잘못도 아닌데 그냥 병원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커진 것처럼, 감당해야 할 큰 일들이 항상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이제 암이라니…. 하나님, 제가 이렇게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들이 비웃기밖에 더하겠어요?’
정말 너무 피곤하니 빨리 하나님 나라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가면 내 삶이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 같은데, 우리 아이들에겐 아직 내가 필요한데, 이렇게 바로 죽을 리는 없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 무슨 일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순종하겠습니다.’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리고 송별회를 향했다. 송별회에서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정신줄을 움켜잡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K 교수님께 여쭈어보았다.
“교수님, 출국이 언제예요?”
“아, 3월 14일이에요.”
K 교수님은 병원을 떠나 2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보통 대학병원을 떠나 보수가 넉넉한 2차 병원으로 가거나, 개원을 하게 되는데, 교수님은 정말 특이하고도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아, 다행이다. 3월 초까지는 너무 죄송하지만 교수님한테 부탁해 볼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일단 두 달은 아플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애써 즐거운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있었지만 오른쪽 전체 등과 가슴이 불타오르는 듯이 아팠다.
‘어떻게 암이 이렇게 아프지? 암환자들이 아파하는 건 말기암일 때잖아. 전이 됐을 때잖아. 뼈에 전이가 되었나? 그럼 어떡하지? 진짜로 곧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럼 우리 애들은 어떡하지?’
통증과 싸우며, 눈물을 참느라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간신히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밝은 목소리로 아이들 이름을 불렀다.
“하은아, 하민아, 엄마 왔어.”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아픈 것이 남편이 아니고 나라서 감사했다.
남편이 이미 교회와 부모님과 담임 목사님께 기도부탁을 드렸다. 여기저기서 기도한다는 카톡이 오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기도의 힘 덕분인지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남편이 당신은 내과 의사 맞냐며 엄청 싫어하겠지만, 마치 전이가 되었던 암세포들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에 전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하시는 일이면 없어지게도 하셔.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야. 그런데 도대체 이 일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고 싶으신 걸까?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걸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구멍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많은 분들의 기도의 힘을 느끼면서도 양쪽 뺨으로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