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8일 (D-16)
다시 일터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11월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받은 은혜가 남아있어 학생강의를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그 해의 본과 1학년 학생들 분위기는 내 교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았다. 어쩌면 내가 역대급으로 상태가 좋아서 아이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은 내 강의를 경청해 주었고, 수업 전 후에 나에게 찾아와서 질문도 해주었다. 어느 날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학생들 무리가 나랑 같이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해서 내 연구실에서 라면을 먹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교수 연구실에서 라면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의 친구들은 내가 강압했거나 학생들이 이상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다. 내분비학 통합강의가 마치던 날 학생들이 내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혹시 내년에도 어떻게든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그 용기가 깡그리 사라지는 사건이 생겼는데, 11월 28일 오후 외래 진료를 마치고 내년에 교수로 남아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펠로우 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내년에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내 계산은 이 친구가 남아주어 어느 정도 환자를 봐주면 나 혼자 학생들 강의는 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었는데, 정말 절망적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날 저녁,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가장 화가 났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모든 것에 화가 났다. 지방의대 교수는 아무도 안 하려 하는 것도, 제일 어려운 환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데도 대학병원 의사들 월급이 제일 적은 이 의료계의 구조도,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병원을 나가버린 교수님에게도, 그렇게 좋은 말로 권유했는데 나가겠다는 펠로우에게도 정말 화가 났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회복되었다고 하면서도 결국 이 모든 일을 잘 감당해 내지 못할 나에게 너무 화가 났다.
사실 우리 펠로우 선생님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내분비내과 분과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년의 펠로우 수련 기간이 필요하고, 이후 1년의 임상경험이 있으면 시험을 칠 자격이 주어진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교수로 남고 싶은 친구가 아니라면 팰로우 1년을 마치면 바로 병원을 나간다. 왜냐하면 펠로우 월급은 2차 병원 과장 월급과 2배 이상, 과에 따라서는 3배까지 차이가 난다. 사실 이 친구는 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1년만 하고 나가고 싶었는데, K교수님이 갑자기 혼자 남으시게 되어 차마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돌아오고 나서 당연히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또 혼자 남게 되었으니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친구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도 이미 너무 큰 희생을 해온 것이다.
다음 날 나는 이 펠로우 선생님을 불러 ‘네가 잘못한 것은 없고, 이 모든 일은 그냥 누구의 잘못으로 일어난 건 아니니 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 속으로는 너무 막막했다. 구인 광고는 소식도 없고, 내분비내과 전문의들은 몇 명 없어서 뻔히 아는데 올만한 사람도 없었다. 이직을 계획하고 있는 선생님들을 수소문해서 모두 전화했지만 모두 다 거절당했다. 대학병원에 들어 올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일이 더 편하기를 하나, 월급이 더 많기를 하나, 특히 지방 사립대 교수는 명예도 딱히 없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상황이 이런데도 나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혼자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 볼까 싶은 마음이었다. 레지던트들 중에 누군가 교수로 남아줄 그 언젠가까지 몇 년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