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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와 도매도

대마도 아니고 도마도, 도마도는 토마토

by 별바라기
유치원 어린이님의 토마토 화분

나의 출퇴근길엔 자동차 정비소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주차장 벽 앞 고무통 위에 토마토 모종이 심어진 화분 몇 개가 올려졌고 삐뚤빼뚤 글씨체로 쓰인 이름표가 꽂힌 걸 보니 주인장은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인 것 같았다. 나는 매일 그 길을 오가며 싹이 크고 노란 꽃이 피고 파랗고 작은 열매가 달리고 커지고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때론 강렬한 폭염을 견디지 못해 축 늘어진 안타까운 모습과 장맛비엔 가지가 휘청이고 부러질 정도로 퍼붓는 빗줄기를 함께 느끼며 걱정된 맘으로 지켜봤고 그 덕분에 그 길은 날마다 흥미진진한 길이었다.




언제 익을까?


"할머이 뭐 해?"


"뭐 하긴 도매도 심지"


"피이 이게 무슨 도마도야"


"이잉 기다리 보래이 이래 심고 거름 주고 비료도 주믄 쑥쑥 커서 도매도가 주렁주렁 달리지"


나는 할머니 말을 믿지 않았다.




한 뼘 밖에 되지 않던 작은 키를 가진 도마도 모종은 텃밭 구석 밭고랑에 덩그러니 심겨 있었고 할머니는 며칠 뒤 산에서 해온 기다란 장대를 도마도 모종과 묶어 주셨다. 나는 이파리서 나는 이상한 냄새와 찐득한 느낌이 있는 모종이 맘에 들지 않았기에 잊고 있다가 어느 날 가지가지마다 별모양을 한 노란 꽃들이 밤하늘에 별처럼 떠 있는 것을 발견했고 벌들도 붕붕거리며 열심히 날아다니기에 호기심이 폭발했다.


"할머이 여기 노란 꽃이 엄청 핐어"


"니가 자꾸 달게 들어 꽃피는 거 쳐다보고 있으믄 꽃 떨어져"




"할머이 노란 꽃이 다 떨어져 버렸어 우뜨케?"


"뭘 우뜨케 꽃이 떨어져야 도매도가 달리지"


"내가 쳐다봐서 떨어진 건 아니지?"


"자꾸 가서 건디리믄 도매도가 못 크고 떨어지니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래이"


나는 이번엔 할머니 말을 듣고 가까이 가서 만지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머이 도마도가 달렸어. 어제보다 더 커졌어. 그리고 빨개지는 거 같애"


"암마또 말고 가매이 있으래이. 부지런한 누가 가서 똑 따먹음 우쨀라고"


"근데 할머이 얼마큼 익어야 먹을 수 있어?"


"씨뻘겋게 익으야 먹지. 오늘 니 핵교 갔다 오믄 익어 있을 테니 언능 학교 댕기와"


나는 도마도를 딸 기대에 좀이 쑤시는 하루를 버티고 잽싸게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멘 채로 밭에 갔지만 아침에 내가 점찍어두고 간 도마도 자리는 휑하니 비어있고 대신 젤 가까이 달려 있던 도마도가 아침보다 더 붉게 익어 있었다.


"니 거서 뭐 하느라 꼬불티리고 앉아 있나?"


"할머이 나 도마도 익는 거 보고 있어"


"이 마한 것 그래 쳐다보고 있으믄 가가 안 익어"


할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오시다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향해 한마디 하시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날 내가 점찍어둔 첫 번째 도마도를 먹은 사람은 막냇동생이었다. 낮에 심심해하던 동생에게 아빠가 도마도를 따보라 하셨고, 우리는 그 뒤로 마당에서 잘 놀다가도 갑자기 냅다 뛰어 도마도가 얼마나 익었는지 확인하는 버릇들이 생겼는데 도마도 싹은 햇살이 뜨거워질수록 쭉쭉 더 키가 자라 할머니는 커지는 도마도 무게 때문에 혹여나 가지가 찢어지지 않게 계속해서 끈으로 묶어 지탱할 힘을 보태주셨다.


도마도가 심긴 밭고랑에 꿀벌 부대가 윙윙거리며 놀러 왔다 돌아가면 거짓말처럼 노란 별꽃들이 피었고 밥압 같이 작은 도마도들이 주렁주렁 달린 뒤 메추리알 만했다가 탁구공 만했다가 계란 만했다가 아빠 주먹만큼 커졌는데 정말 신기했던 것은 아침엔 파랗고 노랗던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오면 빨갛게 익어있던 것이었다.




남편의 고향 토마토

청주 육거리 시장에 갔다가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가 싱싱해 보여 한 박스 사 왔다.

토마토가 이렇게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색으로, 맛으로 품종 개량이 될 줄 감히 상상이나 했었나? 마트에 가면 홍시처럼 빨갛고 예쁜 토마토가 가득인데 나의 어릴 적에 만난 토마토는 색이 그렇게 진하지도 않았고 모양도 매끄럽지도 않은 울퉁불퉁 못난이 토마토였다. 그래도 그 못난이 토마토 덕분에 가끔 허기진 배도 채우고, 특히나 엄마가 토마토를 또각또각 잘라 스댕 찬합에 담아 설탕 눈을 뿌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토마토가 반쯤 숨이 죽었을 때 대접에다 퍼담아 주셨는데 이가 시리다 못해 춥던 그 맛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땐 그 토마토 설탕 국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료라고 생각했었다.




오늘 퇴근길에 만난 자동차 정비소 꼬마 주인님의 토마토는 아침보다 더 붉게 익어 있었다. 몇 알 딴 흔적으로 보아 꼬마 주인님이 수확의 재미를 쏠쏠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정비소 앞 공원에 재색빛 비둘기 커플이 있는데 그 녀석들이 조만간 저 빨갛게 익은 토마도 화분을 습격하진 않을까? 하는 극성 상상도 해 보았다.


이 주렁주렁 방울토마토의 주인은 시어머님이신데

미처 따 잡숫지 못해 몇 알이 떨어졌다. 시골집 새들은 블루베리랑 보리수나무엔 수없이 들락거리는데 방울토마토엔 얼씬도 않는 걸 보면 새들이 먹기엔 아주 맛있는 맛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저 방울이들은 전부 작은아이의 몫이 될 것 같다.


올해 나의 농사 결과

올해 나의 토마토 농사 결과는 이렇다.

모종 값을 다 더하면 육거리 시장에서 반박스의 방울이들을 사고도 남을 값이지만 몇 알 안 되는 금알이들을 아침저녁으로 보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고, 할머니가 심어 주셨던 주먹만 한 도마도는 이제 마트에서나 만나야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찐득한 느낌이 있는 도마도 이파리 냄새를 맡고 있으면 아직도 밭고랑 앞에 쪼그려 앉아 도마도가 익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던 그 시절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다.

냄새와 맛은 참 많은 기억을, 추억을 모셔온다. 방울토마토가 꿀이라며 우적우적 소처럼 먹는 작은아이를 보며 오늘은 한입 방울이 말고 못난이 큰 토마토를 설탕을 뿌려 먹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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