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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네 밤 이야기

댕글댕글 밤

by 별바라기

"엄마 그만 줍고 내려가심 안될까요? 지난번 벌초 때도 많이 주우셨잖아요."


"그땐 밤송이가 안 벌어져서 많이 못 주웠어"


"엄마 계속 이렇게 시간 지체 되다간 할아버지 산소까지 다녀오면 우리 출발 시간 점점 늦어져요"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몇 개만 더 줍고"


"엄마 그거 드시려고 줍는 거 아니잖아요? 다람쥐랑 청설모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안 따라오면 버리고 우리끼리 간다."


"이게 내가 먹으려고 줍는 게 아니야. 어머니 갖다 드릴라 그러지"


"그러니까 엄마는 밤 주워달라고도 안 했을 텐데 왜 애써 줍냐고. 내리막길이라 더 미끄러우니 조심해. 계속 그래 딴전 피다간 산 밑으로 구른다."


발길을 붙잡는 밤송이들

추석 시조부모님의 성묘 하산길에 만난 밤나무는 펄펄 끓다가 하얀 밀가루가 뿌려진 쟁반 위로 부어진 조청 속에 쿡쿡 박힌 땅콩엿의 땅콩처럼 나의 발을 늘어지게 붙잡았고 다람쥐 볼처럼 점점 더 불룩해지는 점퍼 주머니와 손에 쥔 밤들을 흘릴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점점 더 뒤처지는 내가 못마땅한 큰아이와 남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전날까지 내린 비 덕분인지 쩍쩍 벌어진 뾰족뾰족 밤송이엔 빤돌빤돌하게 세수한 알밤들이 두 개 세 개씩 알차게 들어 있었고 양쪽 발 끝에 힘을주어 밤송이를 밟고 입구를 벌려 알밤들을 쏙쏙 꺼낼수록 내 마음과 주머니는 점점 더 댕글댕글 채워지며 신나고 있었다.


밤 봤다~~




"야야 누가 있나?"


"할머이 나 여기 있어 왜에?"


"야나 니 이거 물래?"


"우와 밤이네. 할머이 이래 큰 밤을 어서 땄어?"


"어서 따긴 산에서 땄지?"


"그니깐 어느 산에서 땄냐고?"


"어느 산이라 갈구치믄 나슬라고? 아서 요새 독새가 독이 짝올라 산에 잘못 가믄 클난대이"


"나도 밤 한 번 따보고 싶은데"


"이잉 잘 먹도 않음서 욕심은"




다음날 학교에 생밤 몇 알을 집어간 나는 짝꿍이랑 앞뒤로 앉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고 대번 각자의 방법으로 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현숙이는 껍질을 까고 손톱으로 속껍질을 조금씩 벗겨냈고 영선이는 연필 깎는 칼로 밤을 깎았고 재용이는 겉껍질만 까고 통째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밤 맛있네. 우리 동네 꺼만 못하지만.


"밤이 거서 거지 뭐. 야 근데 니 안 뜳나?"


"우리 동네 밤은 이거보다 훨씬 달어. 쨉도 안돼"


" 너네 동네는 밤나무가 있나? 우리 동네는 한 그루도 없는데."


"야 간나야 밤나무 한 그루도 없는 동네가 어딨나? 네가 모르거나 동네가 꼬진 거지"


"아닌데. 진짜 없어. 우리 동네 아들한테 물어볼래?"


우리 동네 칠 총사였던 아이들의 한결같은 대답을 들은 재용이는 우리더러 재수 옴 붙은 동네에 산다며 믿지 않는 눈치로 오늘 당장 자기네 동네에 밤을 따러 가자고 했다.




첫 밤나무 영접을 앞둔 나와 동네 친구들은 학교서 한 시간도 넘는 길을 걸어 재용이네 동네 뒷산에 갔고 나는 실물 영접 밤송이가 너무도 신기했다. 남자애들이 장대를 휘두를 때는 밤송이에 맞지 않으려고 쏜살같이 멀리 도망갔다가 떨어지는 밤에 등을 맞고 놀라서 소리도 지르고 뾰족뾰족 밤가시에 찔려가며 정신없이 줍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향해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게 보였고 가까이 오신 아저씨 손엔 부지깽이 같은 작대기가 들려있었다.


"이 놈의 새끼들 늬들 다 어서 온 놈들인데 남의 밤나무를 털어?"


밤송이 가시에 찔려도 하하 호호 까르르 웃으며 밤을 까던 우리는 순간 입이 붙은 '얼음' 상태가 되었고 일제히 재용이를 쳐다보았다.


"아재요 저희 반 친구들인데 이 산은 동네산이라 이 산에 밤은 따도 된다 들어서 데리고 왔어요. 아재네 밭에 밤은 손 안댔어요."


"따도 되긴. 늬들 지금 도둑질한 거야. 그제도 누가 차까지 끌고 와 따가서 부화가 났구만. 늬들 밤 딴 거 한 알도 숨기지 말고 여다 다 꺼내놓고 얼른 집으로 가"


우리는 아저씨의 호통에 주눅이 들어 억울한 눈빛으로 주머니며 손에 쥐고 있던 밤을 모두 반납하고 다시 두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깜깜한 저녁이었다.


" 오늘은 와이래 저물었노?"


"할머이.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칠 총사가 원리로 밤을 주러 갔거든 근데 어떤 아저씨가 우리가 자기네 밤을 도둑질했다고 다 냅두고 가라 해서 밤만 따주고 왔어"


"이잉 원니꺼정 갔다고? 누구네 산엘 갔는데?"


"몰라. 아주 못돼 처먹은 아저씨였어"


"원니에 밤산을 가진 사람이 누굴꼬? 얄궂기도 언나들이 딴걸 및 알이라도 노나 주지

그걸 다 빼슨네. 야나 이거라도 주까?"


할머니가 내게 주신 것은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호두 두 알이었다.


2023년 가을에 다시 만난 호두 두 알




내가 나고 자란 깡깡산촌 우리 동네는 희한하게도 과실수가 별로 없었다.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맞은 첫가을.

집집마다 든든하니 뒤꼍을 지키고 있는, 열매도 잎도 하다못해 나뭇가지조차도 멋들어진 감나무의 자태에 홀딱 반한 나는 그해 친정 김장투어에 우리 동네엔 왜 그 흔하디 흔한 감나무도 한그루 없냐고 여쭈니 엄마의 답변은 희한하게도 우리 동네는 밤나무, 감나무가 잘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토질 때문이라 하셨다.

너무 멋쮠 감나무님


지금이야 우리 집 담벼락 밑엔 배랑 사과, 복숭아, 체리, 포도, 머루. 보리수, 매실, 복분자, 자두. 살구, 대추가 심겨 있고 올해도 여전히 주렁주렁 환하게 열린 탱자 어르신까지, 부모님께서 일곱 손주들이 태어날 때마다 기념하여 심으신 과실수들이 자라 철철마다 과일가게에 들르는 듯한 기분에다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즐기며 나이테를 더해가지만 결정적인 아쉬움은 여전히 친정동네엔 밤나무와 감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잉? 넌 누구냐?


얼마 전 출근길.

어제와 다르게 발 앞에 툭툭 채이는 열매가 있길래 무심코 찌그러진 밤인 줄 알고 주웠는데 암만 봐도 주변엔 밤나무가 보이지 않아 두 알을 주머니에 넣고 가 검색해 보니 이럴 수가 진짜 밤이 아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출근길에 주웠다며 동료들에게 밤을 준다며 건넸더니 다들 의심할 겨를도 없이 운 좋게 큰 밤을 주웠다며 부러워했고 결국 아니라고 설명을 했음에도 여전히 밤이라 여기는 분이 계셔서 독이 있는 마로니에는 절대 드심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어릴 적 맘껏 경험하지 못했던 밤 따기 체험을 남편과 아들 눈치를 보며 했지만 소쿠리에 모인 뿌듯한 결과물을 보니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지런히 먼저 훑고 가신 빈 밤송이의 흔적만 보았었는데 올해는 비 때문인지 속을 썩이는 동네분들의 무릎관절통 때문인지 내게도 운 좋게 기회가 부여되었지만 눈치 주는 두 남정네들 때문에 더 줍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밤송이들을 아쉬운 눈빛으로 지나치며 '이럴 거면 내년 성묘는 아예 혼자 올까?' 살짝 고민해 보았다. ㅎㅎ




할머니는 끝끝내 독사로 겁을 주던 큰 밤나무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고 돌아가셨지만 감사하게도 친정이 공주인 올케 덕분에 주먹만 한 왕밤을 만날 수 있어 이것 또한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고 버섯철이 다가오니 아부지는 당신만이 아시는 버섯 군락지에 올해도 송이랑 능이를 채취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더 늦기 전에 그 장소를 전수받아야 할 것 같지만 과연 내가 그 높은 산에 오를 수나 있을까?


오늘밤엔 밤 새 밤이랑 버섯을 찾아 산을 누비느라 잠꼬대에 팔다리를 휘저으며 잘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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