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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와 산삼주

이병장, 입대 500일이 지나다

by 별바라기

"우리 이병장님 요새 근무가 빡센가? 연락이 뜸하네"


"무소식이 희소식 이랬어. 아들이 보고 싶어용?"


아침을 먹다 말고 중얼거린 나의 말에 남편의 질문이 날아왔다.


"응. 요새 문득문득 눈물 나게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지금 그래"


"엄마 그 정도면 병이야 병. 더 늦기 전에 병원 가봐야 해. 근데 우린 에어컨 언제 켜? 밥도 뜨겁고 국도 뜨겁고 더워"


"네가 너무 추운 교실에다 카페만 있어서 모르나 본데 아직 에어컨 킬 때 아니야. 에너지 절약 몰라?"


"근데 덥다긴 보다 습도 때문에 끈적거리니깐 나도 뽀송하게 있고 싶긴 해"


"선풍기 있잖아 선풍기!"


나는 큰 아이가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둘은 더위 탓만 하니 절대로! 에어컨을 켜주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작은 아인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일찌감치시원함을 찾아 스터디카페로 탈출 했고 남편은 선풍기 바람을 의지해 디아블로4에 심취해 계셨고 나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새들이 푸드덕 거리며 우는 소리에 귀는 깨었으나 낮잠의 최대 피해 증상인 눈은 뜨지 못한 채 소파에 누워 있었다. 우리 집엔 앵무새 가족이 있는데 새들은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서 멈추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고 현관문 도어록 첫 비번 누르는 소리와 함께 초인종 보다도 더 강력한 소리를 내는데 새들은 한참 전부터 울었지만 집 안으로 작은 아이가 들어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딸네미 오셨는가?"


남편의 목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고 현관에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흐헉 어떻게 된 거야?"


평상시 잘 놀라지 않는 남편이 격양된 목소리로 현관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하하하 놀랐지? 서프라이즈~"


헙. 이건 분명 아침에 내가 보고 싶다 했던 이병장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가니 아들은 허리를 잔뜩 굽혀 군화의 끈을 풀고 있고 기뻐서 눈물이 나는 것인지 놀라서 눈물이 나는 것인지 내 눈엔 눈물이 고였다. 남편은 아들의 가방을 나는 아들의 손에 있던 짐을 받아 들고 셋이서 찐한 포옹을 하고 바라본 아들의 이마엔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나는 숨겨 두었던 리모컨을 꺼내 에어컨을 켰다.


"너 그거 알아? 네가 왔으니까 엄마가 에어컨 켜준 거야. 우린 택도 없어"


"아 그래요?"


이병장이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드르륵드르륵"


"아이참, 엄마 그새 내가 또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네가 정말 까암짝 놀랄만한 일이 있어"


"뭔데 뭔데?"


"하이 잘 있었는가?"


"어엉? 아 이런, 나 너무 크게 말해서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집으로 갈게"




과일을 담고 있는데 새들이 한바탕 또 시끄러워지는 거 보니 작은 아이가 귀가를 한 것 같았다.


"밖에 진짜 장난 아니야. 하필 가방에 맨날 있던 우산도 없고 머리가 뜨거우니까 어지럽드라 길에서 쓰러질 뻔. 근데 우리 집이 스카보다 더 시원하네. 엄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아빠랑 나랑 그렇게 덥다고 에어컨 켜달라고 할 땐 켜주지도 않더니. 엄마 나빠"


"더 대박인 건 뭔지 알아? 오빠가 켜달라고도 안 했는데 엄마가 알아서 켜 준거야"


"아 이 쏴람들이. 고만하라고. 안 그럼 에어컨 끈다."




아들의 전역을 기다리며

다음 달 전역을 앞두고 있는 큰 아이는 전 부대원들도 다 아는 휴가를 가족들에게만 비밀로 하고 휴가를 나왔고 본인의 계획이 성공한 거 같다며 매우 뿌듯해하며 저녁밥을 짓는 내 곁을 맴돌며 계속 웃고 있었다.


"엄마 근데 이 술 뭐예요?"


"아 그거? 작년에 담근 건데 너 전역주야"


"인삼이죠? 인삼이 꽤 큰대요?"


"응 맘은 산삼인데 아쉽게도 인삼이야. 하지만 효력은 산삼 능가할 거야 아빠랑 엄청 정성스럽게 담갔어 첨 담근 거라 혹시 인삼이 상할까 봐 걱정은 쫌 했지만"


"예전에 외갓집 왕할머니 방에 가면 저렇게 담긴 술 많았잖아요"


"그거 삼촌 장가가면 따서 드신다고 담그셨던 산삼주였어"


"그게 진짜 산삼이었어요?"


"응 엄마가 알기론"


"그럼 그거 삼촌 결혼하고 드셨겠네요?"


"근데 내가 술에 관심이 없어 그런가 있었던 거 까진 기억을 하는데 그 이후론 어떻게 됐는지 몰러. 담에 삼촌한테 물어봐 산삼주 먹었는지"




태백산에서 온 장뇌삼

"애비야 이것 좀 봐 본나"


산에 다녀오신 할머니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야야 늬들도 마큼 이래 와보래이"


마루서 놀던 우리는 할머니가 약초를 풀어놓고 작업하시는 마당 구석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이고야 어머이 삼이 자네요. 이거 어서 캤쓰요?"


아빠의 목소리와 눈이 놀라는 게 보였다.


"내가 신데이 넘고 큰골 재까지 넘어갔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한 번도 안 간 골짜구로 드간기라. 근데 바람을 타고 어서 더덕 냄시가 나길래 더덕 싹 찾을라 가다보이 글쎄 삼 이파리가 보이지 모나"


"어데 남의 장뇌삼 밭에서 캐온건 아니지요?"


"이잉 누가 그래 먼 골짜구에 씨를 뿌리나. 어디 시(새) 시끼나 놀갤(노루)가 뜯어먹고 똥을 싼 기지"


"괜히 남의 삼 밭 건딜믄 산 값 물어줘야 되니 잘 보고 댕기요"


"근데 야야 이걸 장에 내다 팔믄 돈이 좀 될라나?"


"삼이 작아 임자도 안 나설 거고 그냥 어머이 약이나 해요"


"이잉 약은 무슨. 싹이 쪼맨해도 삼은 삼인데. 술 담가서 낭중에 OO이 장가갈 때 무야지."


할머니는 초록색 풀물이 들고 또 들어 갈색으로 변해버린 굳은살 가득한 손으로 막냇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흡족해하셨고 꼬불꼬불 작은 산삼 두 뿌리는 쓴 냄새를 풍기는 소주에 풍덩 담겼다.




태백산 삼으로 담근 술

"제수씨 이거 뭔지 알아요?"


"설마 산삼이에요?"


"그쵸 산삼 같아 보이죠?"


"산에 다니신다더니 진짜 산삼도 캐신 거예요?"


나는 우리 집 술병에 담긴 쭉쭉 뻗은 큰 삼의 모양이 아닌 할머니 방에 있던 작고 꼬불꼬불한 자태로 담겨 있던 삼 뿌리가 떠올라 호기심이 급 발동했다.


"OO엄마 속이면 진짜 홀딱 속겠는데. 산삼은 무슨 산삼이야. 그리고 산삼이면 아직까지 뒀겠어? 진작에 먹었지"


"저는 강사장님 산에 가셔서 버섯도 따오시고 나물도 뜯어오시고 재주가 좋으시니 진짜 캐신줄 알았죠"


"으이그 산삼이 아무 눈에나 보인대? 그렇게 높은 산에 저이 올라가지도 못해. 우리 이모가 태백 사시는데 몇 년 전에 산에다 장뇌삼 씨를 좀 뿌려 놓으셨대. 지난주 친정 갔다가 이모네도 들렀더니 캤다고 담금주 하고 삼 몇 뿌리 주셨어. 이따 갈 때 싸줄 테니 집에 가서 자기 부부도 한뿌리씩 먹고 딸네미도 먹여"




동생이 하사한 심봤다~~

"뭐 택배 올 게 있었나 봐?"


남편이 퇴근하면서 아이스박스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나 뭐 시킨 거 없는데"


"발송자는 어디 상호명 같고 당신 앞으로 왔는데"


혹여나 남의 집 택배를 뜯을까 걱정이 된 나는 한 번 더 확인하고 개봉을 해보니 새싹쌈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흐헉 이게 모대? 심봤다~~~ 근데 누가 보낸 거지?"


나는 발송자를 추측하느라 잠시 고민에 빠졌고 가끔씩 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특이한 음식들을 보내는 동생일 거 같다는 짐작에 전화를 걸었다.


"이모야 혹시 택배 보냈나?"


"어 언니야 택배 잘 드갔드나?"


"난 또 누가 보냈나 고민했자네"


"언니도 감기 앓고 계속 빌빌대는 거 같고 형부도 기운없대고 고삼이도 기운 내서 여름 나야 하는데 먹고 기분도 좋아지고 기운도 내보라고 보냈어. 나는 갈아먹거나 샐러드로 먹는데 먹을 만 하드라고"


"내 머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거 생각도 못하는데 니는 아이디어도 참 기발하다. 눈으로만 봐도 막 기운이 나는 거 같애"


"언니야 왜 생각 안 나나? 할머니가 산에 갔다가 산삼 캐서 아플 때 드시고 기운내고 우리도 한뿌리씩 먹고 그랬자네"


"내가 클 때 산삼을 먹었다고? 전혀 생각 안 나는데"


"내 기억으론 몇 번 있었어. 엄마도 인삼에다 꿀 찍어서 우리 생으로 씹어 먹으라고 줬었고. 근데 언니는 워낙 편식이 심했어서 먹는척하고 안 먹었을 수도 있었겠다."


"내가 먹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때 안 먹었었나 봐. 그때 그걸 먹었음 지금 안 아플 수도 있는데, 네가 보내준 삼뿌리랑 이파리까지 싸그리 먹고 기운 내 볼게"


동생이 보내준 새싹쌈은 우적우적 씹어 먹기엔 정말 아까운 고마운 마음의 결정체였다.




할머니가 산삼을 캐오셨던 그해 가을.

아빠와 할머니는 순식간에 자랐다가 녹아 없어져 버리는 버섯을 따러 매일 같이 부지런히 산에 오르셨는데 그 산삼을 캐셨던 자리를 다시 찾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셨지만 번번이 찾지 못하고 버섯만 따서 돌아오셨다. 할머니는 그날 당신이 산안개에 홀려 눈에 뭐가 씌어서 길을 잃고 그 골짜기로 들어가 산삼을 캐신 거라고 얘기하시며 매번 흐뭇해하셨고 할머니 방 장식장에는 산삼 두 뿌리가 들은 술이 꽤 오랫동안 익어가고 있었다.




이병장의 깜짝 특별휴가 기간 중에 입대 500일을 맞은 우리 가족과 아들의 친구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로 그간의 군생활과 전역 임박을 축하해 주었는데 아들의 백일잔치 이후 뭔가 백단위로 센 건 아주 오랜만인 일이었기에 기분이 새로웠다. 인터넷에군인들이 전역을 자랑하려고 대전역에 가서 기념 사진을 찍는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가까이 죽전역이 있어 대전까지 가는 수고로움은 줄었다며 웃었다.


오늘도 물 마시러 주방에 들렀다 또 하루 더 익어가는 전역주를 바라보면서 '좋은 성분 쏙 쏙 뽑아내어 맛있게 익어라' 주문을 거는 나를 보며 할머니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상상해 본다. 분명 안개 가득한 산에서 길을 잃고 무섭기도 하고 당황도 하셨을 테지만 위기가 기회가 되어 운 좋게 산삼을 만났고, 손수 캐신 산삼주가 익어 먼 훗날 손자의 잔칫날에 귀하게 쓰고 싶으셨던 할머니의 소망이, 손자를 향한 그 축복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왜 그때는 몰랐을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모르는 게 참 많다...


아쉽게도 나도 아들도 알쓰(알코올 쓰레기)인지라 전역주가 얼마나 빛을 발할 진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하셨던 일들을 함께하면서 나는 계속 할머니와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언제나 나에게 든든함이고 따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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