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황색에 삼각형 모양을 한 채 주렁주렁 달려 있는 주머니 하나를 뚝 떼어 열어 보았다.
"예쁜 게 들었네. 근데 이 쪼맨한걸 어떻게 불어?"
"안즉 들 익어서 안되고 낭중에 익거들랑 갈차줄게"
꽈리 줄기는 나일론 줄에 돌돌 묶여 할머니방 벽에 있는 시커먼 대장 못에 걸렸다.
한가롭던 겨울의 어느 날.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우리는 할머니방 침침한 백열등 아래에 모여 할머니 도방구리서 꺼낸 바늘을 한 개씩 들고 아까부터 꽈리 씨를 빼내고 있다.
"우이쒸 할머이 내 거 또 찢어졌다."
"재주도 재주도 그리 없기는. 아깨우니 약이라 생각하고 씹어 무"
"맛이 없는데"
"이잉 누가 약을 맛으로 묵나"
"근데 야는 어디에 좋은데?"
"어디에 좋긴 고뿔에 좋지"
"힝 난도 찢어졌어"
"난도"
성질 급한 나를 시작해 연이어 실패자가 속출했지만 언니는 온 신경을 바늘 끝에 모으고 씨앗들을 하나하나 꺼내는 일에 성공했고 드디어 만난 빨간 꽈리공을 입에 넣고 부아악 부아악 소리를 내는 모습을 우리는 신기하게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할머이 난 왜 안 될까?"
내게 꽈리씨를 꺼내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꽈리공을 만들었음에도 엄마나 언니처럼 꽈리를 불 순 없었다.
"언니야 나는 왜 공이 자꾸 짜부러지나?"
"연습해야지. 거저 되는 게 어딨나?"
공부도 그림도 서예도 뭐든 잘하는 언니는 꽈리까지도 잘 부는데 오늘도 또 똑같은 말을 한다. 연습하라고.
오기가 생긴 나는 할머니방에 들락거리며 꽈리를 따다 날랐고 연이은 실패로 할머니 방에 꽈리 주머니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이 마한 것 약도 못하게꾸루 다 따다 날랐네. 이건 식구들 약이니 손대지 마래이"
할머니가 들에서 새로 구해 오신 꽈리 줄기에 주황색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할머이방 꽈리 손대지 말고 이거로 연습해"
아랫마을에 다녀온 언니가 우리들에게 나눠준 것은 유리구슬 만한 고무로 된 하얀 꽈리공이었다.
"언니야 이거 어서 났나?"
"어디서나긴 샀지"
"그니까 이런것도 팔드나?"
"기봉이네 가게 갔는데 오늘 새로 드왔다길래 다 팔리기 전에 얼른 샀지"
"언니야 고마워. 근데 이거 비싸제?"
"한 개에 오십 원"
"오십 원? 엄청 비싸네"
"그러니 잘 써. 물고 자다 삼키지 말고"
"내 무슨 바보 줄 아나"
나는 눈뜨고 있는 낮 시간 내내 고무 꽈리를 입에 물고 있었고 언니의 예지력(?)대로 물고 자던 밤이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고무꽈리의 작고 동그란 입구는 찢어져 버렸다.
"할머이 나 열나는 거 같애"
할머니는 투박하고 작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 보셨다.
"오만데찬바람 씨고 짤짤 거리고 쏘 댕기두만 고뿔 오네"
할머니는 벽에 걸려 있던 꽈리 주머니를 떼서 내 손바닥에 말캉한 꽈리를 3알 올려주셨다.
"꼭꼭 씹어 무래이"
나는 안방에 있는 물약이 떠올랐지만 꽈리를 먹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뜨끈한 구들장 덕분인지 꽈리 덕분인지 말짱해진 나는 할머니 말마따나 짤짤 거리며 다시 온 동네를 쏘 다녔고 엄마가 파란색 뜨개실로 밤을 새우며 떠준 새 바지를 입고 뒷동산으로 잔디 썰매를 타러 갔다. 여느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하필 그날은 바닥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냅다 과속을 한 결과 바지 올이 걸렸고 마치 지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커다란 진동이 느껴지더니 바지코가 끊어져 버렸다. 그때 바로 집에 갔으면 긴급 복구라도 가능했는데 나는 끊긴 실을 용감히 잡아당겼고 꼬불꼬불한 라면처럼 술술 풀리는 느낌이 어찌나 좋은지 죽죽 잡아당긴 결과 엉덩이엔 순식간에 손바닥 만한 구멍이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나는 구멍 사이로 보이는 내복을 풀린 실로 대충 가린 뒤 엄마의 눈을 피해 몰래 할머니 방으로 숨어들었다.
"할머이 이것 좀 봐. 나 우뜨커지?"
"이 마한 것좀 보래이. 우째다 이랬나?"
"쓸매 타다가 나무 뿌렁지에 걸리서"
"쌔바지를 입고 나갈 때 뭔 일 나겠다 싶두만. 늬어미 매타작 하기 전에 얼른 가서 잘못했다 싹싹 빌래이"
"할머이는 이거 못 고쳐?"
"못고치. 손가락이 다 굽어가꼬"
할머니는 굳이 안 보고 안 들어도 그림 같이 펼쳐질 앞날을 예상하시곤 당신이 고쳐주지 못하는 미안한 표정을 숨기시지 못한 채 어여 안방에 가서 엄마한테 싹싹 빌라 내 등을 미셨고,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장롱 위에 고이 모셔져 있던 싸리나무 회초리 회동으로 인해 나의 엉덩이엔 빨간색으로 된 동양란 몇 줄기가 쳐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하루 만에 빵구를 내고 잔디 이파리를 잔뜩 묻혀 온 파란색 바지는 다시 동그란 공으로 변신했다가 남동생의 새 바지로 변신했고, 나는 그 뒤로 뜨게 바지도 스웨터도 조끼도 절대 입지 못한 대신 이모네 큰오빠가 입고 작은 오빠가 입던 옷들을 물려 입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새벽 2시 55분인 지금의 나는 감기로 고생 중인데 저녁 식사 후 복용한 약에 곯아떨어졌다가 단전 부터 끌어 올린 기침에 잠이 깬 뒤 더 이상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전체가 잠든 조용한 새벽. 다행히 윗집도 조용하다. ㅎㅎ
식구들이 잠에 깰까 조용조용 탄 따뜻한 도라지차로 기침을 달래다 식탁 위 약 봉다리에 안에 보이는 8알이나 되는 알록달록 약들이 눈에 들어왔고 3일 치나 먹었는데 별 차도도 없는 이 약 말고 빨간 꽈리 3알이면 혹시 감기가 뚝 떨어질까? 상상을 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할머니 방에 겨울철마다 익숙하게 비상약으로 매달려 있던 꽈리 주머니들.
언니가 고이고이 모아둔 비상금을 털어 사줬던 고무꽈리.
꽈리 부는 법을 알려주시던 젊은 시절의 엄마 모습.
그리고 지금 내 나이에 첫 사위를 본 엄마를 생각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그렇다 치면 언니는 벌써 할머니가 되고도 남은 나이고 내년이면 나도 할머니로 등극하는 나이가 되는 거잖아? 이런!
순간 오려던 잠이 더 멀리 달아났다. ^^;
넉넉한 산골 생활은 아니었지만 가족들 간의 사랑은 넉넉하다 못해 흘러넘쳤던 유년시절을 돌아보니 할머니와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꼬물꼬물 모여 놀던 우리 사 남매의 어린 시절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처음엔 탱탱하니 반짝이던 빨간 꽈리알이었으나 겨울을 보내면서 쪼글쪼글 말라가던 꽈리알처럼 우리 사남매도 중년의 삶을 살고 있고, 우린 절대 늙어 가는 게 아니라 좀 더 성숙해져 가는 거라고 어디선가 주워 들은 말로 위로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제 일주일 뒤로 뒤로 다가온 설날에 친정식구들을 만날 일도 기다려진다.
자! 이제 잠만 오면 되는데 추억 여행을 너무 빡세게 했는지 그 시절 속에서 천방지축 놀고 있는 나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보니 창 밖엔 어느새 새벽이 노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