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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와 칡 이야기

칡꽃 향기를 타고 추억은 방울방울

by 별바라기

"야 뭐 하냐?"


"뭐 하긴 아줌마가 밥 할 시간 됐으니 밥하고 있지. 뭔 일 있나? 이 시간에 전활 다하고?"


"일이 있긴 있지. 내가 말이야 지금 편의점에 왔거든. 근데 김밥을 먹을지 삼각김밥을 먹을지 고민이 돼서"


"이 문디. 그냥 니 묵고 싶은 거 무면 되지 꼴랑 그 걸로 전화를 해?"


"꼴랑 그거라니 오늘 신성한 나의 첫 끼야"


"신성하긴 개뿔. 쌀이 없어 굶었다믄 불쌍 키라도 하지. 네가 귀찮아서 안 먹었을 거 아녀"


"야 너는 내가 말을 안 해도 어떻게 그리 잘 아냐?"


"야이 이눔아. 네가 그러니깐 평생 나한테 좋은 소리 못 듣는 거야. 그나저나 요즘 어떻게 지내나?"


"나? 어떻게 지내긴. 잘 지내지"


"그니께 얼마나 잘 지냄 하루에 한 끼 밖에 못 먹으면서 지내냐고?"


"나? 요즘 산에 다녀"


"뭐 산타? K2라도 정복하게?"


"쯧쯧, 아줌마 언제 적 개그야. 내가 말이야 요즘 건강원하는 친구 따라 칡 캐러 다녀"


"엥? 이 추운 계절에 칡을 캐러 다닌다고?"


"요즘 캐야 약발이 좋다나 뭐라나"


"야아 뉴스에 날 일이다. 사회복지사님이 산에 칡을 캐러다니고"


"지난주부터 캤는데 오늘은 쉬고 낼 하루 더 캐고 즙 내린다는데 좀 보내줄까?"


"공짜면 안 먹고 판다 하면 먹고"


"그래 특별히 택배비까지 청구해서 보낼게"


"야 산에서 욕심내다 괜히 구르지 말고 조심히 다녀"


"그럼 119가 구하러 오겠지"


"쫌 듣는 척이라도 해. 119는 뭔 죄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였고 지금까지 친구니 이 눔은 나의 몇 년 지기 친구인가? 뭐 암산도 잘 되지 않지만 내가 이 눔 저 눔 할 수 있는 만만콩떡 같던 친구는 사회복지사로 멀쩡하니 근무를 하다가 별안간 한겨울에 백수가 되었고 뜬금없이 전화를 해와선 산에 칡을 캐러 다닌다고 했다.




홍천군 홍보대사는 아닙니다만 ^^;

얼마 뒤 보약박스 상자에 투명테이프를 미라 붕대처럼 칭칭 감은 칡즙이 한 박스 도착했고 나는 잔에다 칡즙을 담아 남편에게 건넸다.


"물 맑고 산 깊은 강원도 홍천에서 OO이가 캔 칡으로 짠 칡즙이야."


"음 진하네. 칡 향이 난다."


"당신도 클 때 칡즙 먹어봤지?"


"아니. 이렇게 된 칡즙을 먹은 적은 없고 칡뿌리를 찢어 씹어 먹은 적은 있었지. 그게 생각보다 수분이 많아서 산에 밤 따러 갔다가 갈증 났을 때 갈증 해소로는 최고였어. 당신은 안 먹어봤어?"


"칡뿌리는 써서 입에도 안 댔고 주전자에다 나무토막 같은 뿌리를 넣어서 끓이면 시커먼 물이 나오잖아. 그걸 약으로 먹으라고 주셨는데 너무 맛없어서 설탕을 타서 먹었었어. 근데 색깔도 별로고 맛도 없어서 많인 안 먹었지. 그때 많이 먹어놨음 감기가 걸렸을 텐데"




칡꽃향은 할머니와의 추억을 모셔온다.

"니 내하고 토끼풀 비러 안 갈래?"


"할머이 어디로 갈건대?"


"가래꼴"


"할머이 요새도 가재가 있을까?"


"물이 있으믄 가재도 있을 티지"


"그라믄 갈게"


나는 할머니를 따라 토끼풀을 베러 집을 나섰다.


"야야 좀 슀다 가자"


다리가 아픈 할머니는 몇 백 미터 걷지 못하시고 밭가에 경계석으로 세워둔 넙덕한 돌멩이에 그 작은 몸을 쉬게 하셨다.


"할머이 다리 마이 아프믄 여 어디 가까운 데서 비서 갈까?"


"아니여 오늘 가래꼴에 가야 윤하고 깨끗한 거 뜯어 오지"


"왜 토끼한테 연한 거 줄라고?"


"그래. 토끼도 묵고 내도 묵고"


"칡뿌리만 먹는 게 아니고 이파리도 먹을 수 있어?"


"그라모 칡은 뿌렁지부터 이패리까지 못 먹는 게 엄찌"




어쩜 이리 고우니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경운기도 못 들어가고 간신히 리어카만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깊숙한 계곡에서 간간이 귀를 간지럽히는 물소리가 들렸고 나는 온통 가재를 잡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할머니는 양손에 작대기를 짚고 혹여나 소리 없이 스르르 지나갈 뱀을 의식하신 듯 바닥을 이따금씩 쿵쿵 치셨고 산에서 꾸불꾸불 내려와 진로를 방해하는 칡덩굴과 나팔꽃, 가시덤불들을 작대기로 들춰 산을 향해 방향을 틀어 주셨다. 더 걸으니 눈치 없이 주차장 차단봉처럼 길을 수시로 막고 있는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진로를 방해했고 가지를 꺾으며 할머니는 혀를 내두르셨다. 장마와 더위에 정신없이 자란 아카시아 나무는 마치 잭과 콩나무의 마법 콩나무 같았는데 길어지는 작업에 할머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땅으로 주르륵 떨어지고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땀을 훔치는 수건 뒤로 할머니의 가뿐 숨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칡잎을 따려고 정한 장소에 도착을 한 할머니는 산에 있는 모든 나무와 바위, 식물들에게 시비를 걸 듯 칭칭, 꽁꽁 감은 칡덩굴들을 낫으로 뚝뚝 끊어 길을 만드셨고 가을날 자밭에서 깻잎나물을 뜯듯이 연한 잎들만 한 장 한 장 따서 모으셨다.


나는 가재를 잡으려고 계곡으로 내려갔는데 계곡은 깊었고 물은 얕았다. 꽉 덮인 나무 지붕과 나뭇잎 그림자 때문에 물속은 안개 낀 새벽처럼 답답해 보였고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바위에 폭신하게 잔뜩 낀 이끼가 우리 집 수돗가에 있는 수세미 같아 보였다. 나는 잔뜩 기대하는 맘으로 살살 돌을 들췄는데 돌 밑에는 기대했던 가재는 없고 온갖 벌거지들이 나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엔 노네각시(노래기)처럼 다리만 많은 못생긴 벌거지들이 많았는데 이놈들이 갑자기 내 손등과 발등으로 타고 올라와 나는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털었다. 그리고 분명 쫄쫄쫄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던 계곡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눈과 양쪽 귀에 날벌레 부대도 공격하 듯 날아와 성가시게 했고 나는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잡으려 손뼉을 연신 치느라 바빠져 물속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간신히 신발만 적실만한 얕은 물에 잠깐 쪼그려 앉아 있었을 뿐인데 발은 시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계곡을 타고 날아와 쓱하니 등을 훑고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에 한기가 느껴진 나는 잠깐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손을 흔드는 나뭇잎들의 소리, 아직도 발과 손에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단숨에 계곡을 뛰어올라 할머니를 찾으니 아까보다 더 높은 산등성이에 노란 수건을 목에 건 할머니가 보여 그리로 달려갔다.


"할머이 마이 땄어?"


"여 보래이 마이 땄제? 야야 이래와 본나? 니 이거 지고 갈 수 있겠나?"


할머니가 내게 손짓으로 가리킨 것은 칡덩굴로 만든 가방끈이 달린 칡잎과 칡덩굴을 둘둘 모아 말은 보따리였다.


"할머이 음청 가볍네. 더 비서 보태도 될 거 같애"


"첨이야 가붑지. 그거 메고 집꺼정 갈라믄 똥 빠질 낀데"


"할머이 나 힘 쎄자네"


"그래 기운이 장사인 손녀 덕좀 보재이"




할머니 말은 참말이었다.

칡덩굴 보따리를 가볍게 지고 출발했던 나는 집을 코 앞에 남겨 놓고 기운이 소진되었고 등에 메었다 머리에 이었다 결국 질질질 끌고 가다를 반복해 간신히 토끼장에 별식으로 넣어 주었고 할머니는 나물 삶는 솥에 칡잎을 삶으시곤 물기를 꼭 짜서 두신뒤 사발에 온갖 재료들을 넣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빨간 양념을 칡잎 한 장 한 장에 정성스레 발라주셨다.


"할머이 이게 맛있어?"


"이잉 맛있기만 해 이게 약이 자네"


"어디에 좋은데?"


"칡뿌렁지가 간에도 좋고 고뿔도 낫게 하고 무릎고베이도 들 아프게 하잖나. 요래 여름엔 칡이패리를 먹으믄 칡뿌리 먹은 거나 진배읍지"


"아 할머이 무릎고베이가 아파서 이거 먹으려고 했었구나?"



혹쉬 칡 숙녀신가요?

남편과 산보하던 중 바람을 타고 오는 칡꽃향기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칡꽃향이 이렇게 좋은지 예전엔 몰랐네."


"향기가 얼마나 강렬하면 이 먼데까지 바람을 타고 온 걸까?"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꽃향기의 출원지를 추적해 갔다.


"주변에 칡덩굴은 많이 보이는데 꽃이 다 피지 않는 걸 보면 암칡만 꽃이 피는 거겠지?"


"몰라. 나는 거기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어. 그냥 다 꽃이 피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본 칡도 그냥 파랗기만 했던 거 같애. 여보 나는 매번 칡꽃 향기를 맡음 다리 아픈 할머이가 생각나 마음이 울컥하다. 진짜 칡이랑 칡잎 반찬 드시고 다리는 덜 아프셨을까? 할머이 향기는 참 구석구석 행복하기도 하지만 슬프게도 남아 있어"


"그 기억들을 잘 떠올려서 야나할머니 이야기에 잘 담아봐. 그리고 나는 좀 덜 등장하게 해 주고. 내가 나오는 부분 읽으려면 너무 오글거려"


"근데 어쩔 수가 없어. 내 이야기의 시작점이 가족이고 생활이니깐. 그리고 어차피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내가 나를 알잖아. 당신 이참에 새롭게 창작을 해보면 어때? 당신의 그 무한 상상력과 뜬금 정신을 발휘해서"


"노노. 있던 일도 이래 버벅대면서 쓰는데 소설은 무슨. 브런치에서 읽은 바글바글 다양한 장르의 글들을 내 생각이라 착각하고 이래저래 짜깁기해서 소설이랍시고 올리면 국정원에서 잡으러 올지도 몰라"


"그러니 써봐. 진짜 잡으러 오는지 아닌지"




혹쉬 칡 신사신가요?

다음날 일터 가는 길에 무심히 지나쳤던 칡덩굴 무더기 몇 곳을 살펴보니 진짜 꽃은 없었다. 가을에 낙엽이 되기 전까지 꽃이 피는지 간간히 살펴봐야지. 그리고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언제까지 소환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만약에 욕심을 낸다면 소설 말고 동화를 써보고 싶다. 그런데 그러기엔 요즘 내 마음 보따리는 원전 오염수라 꽤 긴 시간 동안 마음보따리 정화부터 애써야 할 것 같다. 산책중 마주친 유모차에서 꼬리 흔들어 주는 강아지 한 마리에도 흐뭇한 미소를 잊지 말고 바닥까지 나를 내려 놓는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

8월의 각오는 차카게 살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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