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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Nov 04. 2023

야나할머니와 어둠 1

정전 그리고 전깃불

8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네 식구가 모처럼 둘러앉아 여유 있는 저녁식사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식탁등이 한 번 깜빡, 정전이 되면서 에어컨도 꺼지고 거실엔 어둠과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어 정전이다."


 나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찾아 손전등을 켜고 베란다로 나가 살펴보니 아파트 전체는 물론 우리 동네의 불야성 지역인 먹자골목도 깜깜하게 먹통이 되어 있었고  주차장에 있는 비상발전기 작동 소리와 함께 앞동 복도 계단에 비상등이 차례로 켜지는 것이 보였다


"대박! 먹자골목도 먹통이야. 외식하던 사람들 난리 났겠는걸"


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어둠이 깔린 주차장 아래로 떨어졌고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살피려 나처럼 베란다로 나온 주민들로 앞동 유리창에 불빛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여보 아까 한 번 깜빡했으니 한 시간 걸릴까?"


"글쎄다. 원인이 뭐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전력 부족이라 뉴스 나오더만. 누가 또 애꿎은 전봇대를 들이 박은건 아니겠지?"


"그러면 119가 출동하겠지. 소리 나나 잘 들어봐"


어느샌가 남편이 켠 램프에 거실은 캠핑장처럼 아늑해졌고 갑자기 벽에 생긴 커다란 그림자를 잡아보려고 앙꼬가 몸을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정전도 나름 괜찮네. 냉동실 물바다 되지 않게만 들어오면 좋겠다."


"엄마 근데 왜 한 번 깜빡하면 한 시간이 걸려요?"


"어 그거? 엄마 클 때 정전이 자주 됐거든. 그런데 한 번 깜빡, 두 번 깜빡, 이렇게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를 하는 횟수가 있었어. 그러면 어른들이 그 횟수로 전기 복구 시간을 가늠하셨지"


"에이 그냥 우연이었겠죠"


"아니야 진짜였어. 그게 일종의 약속 같은 거였다니. 여보 진짜지?"


"아빠 클 때도 그런 얘기는 있었어"


"요즘 같은 더위에 한 시간이 넘도록 정전이면 민원이 엄청 발생하지 않을까요?"


"한전이 능력을 발휘하겠지만 지금이라면 천천히 들어오는 것도 나는 괜찮아. 근데 우리 아파트 어르신들 많아서 의료기 쓰시는 분들 문제 되진 않겠지? 우리 한진 때도 아래층 아저씨 산소호흡기 달고 누워계셨었잖아"


"그 정도면 요양원에 가셨거나 비상용 발전기가 있겠죠."


큰 아이와 가족들과 창 밖을 내다보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이십여분의 시간이 지났고 그때 앞동 맞은 층에서 휴대폰 손전등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보였다 수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은 앞동 사람들이 보내는 신호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고받았고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와 앞동 가족의 웃음소리가 공중에서 만난 그즈음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매몰차게 집 나갔던 전기가 돌아왔는데 주변이 환해지는 대신 집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일상으로 지낼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가전제품의 소음들이 거실로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바람이 부는기 비가 크게 한차리 딸굴라나비다. 늬들 일찌감치 비설거지 해 노래이."


하늘을 살펴보시던 할머니가 걱정스레 말씀하셨다.


"오늘 비 온단 얘기 없었는데"


"하늘 봐라 구름 끼는 게 마이 올 비여"


나는 할머니 말을 흘려듣고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깜빡, 깜빡


"우쒸 두 번이나 깜빡였지? 나 마녀가 내준 숙제 산더민데 왜 하필 지금 정전이래"

 

나는 국사 빽빽이를 하다 말고 짜증을 내며 초를 찾고 있었는데 그때 집이 흔들리며 쪼개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정말 대낮 같이 마당이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번쩍하는 번개가 쳤고 놀란 나는 소리를 질렀다.


"우쒸 깜짝이야. 이 정도면 거의 지붕 위에서 친 거잖아?"


나는 찾던 초를 포기하고 장롱에서 얼른 이불을 꺼내 망토처럼 두르고 두 팔을 펼치자 양쪽 팔 아래로 동생들이 쏙쏙 들어왔고 우리 셋은 마당을 쪼갤 듯이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와 하늘도 쪼갤  듯이 번쩍거리는 번개에 감탄하다 느껴진 서로의 팔뚝에 바글바글 돋아난 닭살을 쓰다듬어 주며 깔깔거렸다.


"야야 방방마다 전굿불 다 끗나?"


세찬 빗줄기 사이로 할머니 목소리가 날아왔다.


"할머이 지금 정전이 자네"


"맞다 정전이제. 잘됐네. 이래 번개 칠 때는 전굿불 끄놔야지 안그람 벼락 맞아 집에 불난대이"


할머니는 항상 천둥 번개가 칠 때마다 방에 불부터 끄라고 잔소리를 하셨고 식구들이 놀랐던 일은 작년 여름 엄청난 비바람이 치던날 수돗가 처마 밑에 달려 있던 백열등 전선에 물이 타고 흐르면서 불꽃이 튀면서 전선에 불이 붙었고 폭죽 터지 듯이 전구가 터졌었다. 그 광경을 우연찮게 젤 가까이서 목격했던 나는 수업 시간에 배운 대로 얼른 두꺼비집을 내렸고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지만 그 이후로 희한하게 그 전등엔 잔류전기가 흐르면서 등을 켜려고 손을 뻗는 우리 식구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열등 전구에 키가 닿지 않았던 동생들은 접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매일 저녁 우리 집에 어둠이 찾아오면 무조건 집구석구석에 전깃불을 켜 놓아야 했던 나는 잔뜩 쫄았고 그땐 고무장갑도 흔하지 않았기에 나는 궁여지책으로 겨울 털장갑을 끼고 백열등 스위치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을 무렵 동네에 대대적으로 전기를 손봤고 희한 케도 잔류전기는 속 시원하게 사라졌다.  




동네 슈퍼에서 만난 반가운 형광등 스위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엔 아주 오래된 상회가 하나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동네가 생길 즈음부터 있었을 것 같고 주인 할머니도 엄청 연로하신 것을 보면 낡은 간판만큼이나 역사를 자랑하는 상회인데 한 날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처음으로 상회 셔터가 내려가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대롱대롱 형광등 스위치를 보게 되었다.


"대박! 이 반가운 스위치를 여기서 보네?"


"워워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감탄하며 신이 나서 사진을 찍는 등 뒤에 남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남의 집 막 찍으면 혹시 잡혀갈까?"


"잡혀가진 않아도 충분히 이상하게 볼 순 있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치 안에서 우리 부부의 얘기를 들은 것처럼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셔터가 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기 나는 경보 걸음으로 얼른 그 앞 벗어났다.


"여보 내가 왜 그 형광등 스위치가 반가웠는 줄 알아?"


"예전에 집에 저 스위치가 있었겠지"


"예전에 내 방에 형광등 불을 끄려면 방바닥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 달린 스워치를 눌러야 불을 끌 수 있었어. 그런데 누웠다 일어났다 반복하며 불 끄기가 너무 귀찮은 거야. 가뜩이나 초저녁 잠도 많은데 일 분 이분 미루다가 결국 켜놓고 자서 아침에 어른들한테 쿠사리 엄청 먹었지. 그래 한 날은 아빠가 까만 테이프로 똘똘 말아놓은 전선 뭉치를 살살 풀어봤더니 숨어 있던 전선이 생각보다 길어 일어나지 않고도 손만 뻗어 켰다 껐다를 할 수 있게 됐어. 근데 최대 문제는 방 한가운데 늘어져 있는 전선줄을 어른들이 곱게 봐주실리 없잖아. 혹시나 들키면 뼈도 못 추릴 거 같아서 학교 갈 때전선을 둘둘 말아서 벽에 못에 깐쫑하게 걸고 큰 옷으로 가려 완벽 위장을 해 놓고 학교엘 다녔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한날은 바빠서 학교로 내뺐던 날 생전 내 방엔 발걸음도 안 하던 엄마가 아랫목에 청국장을 띄운다고 들어오셨다가  들킨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게?"


"뭐 어떻게 돼. 보나 마나 장모님한테 씨게 등짝 스매싱 당했겠지."


"역시 당신은 위험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이제 그만 사라져 줘야겠다."


내가 팔을 뻗어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남편이 창피하다고 떨어져 걸으라며 경보걸음으로 성큼 달아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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