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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Dec 09. 2023

야나할머니와 동동구루무

동동구루무가 남겨준 그리움...

"6일까지 뽀빠이 젊은 여친 세일 하드라"


"헐, 엄마 그게 무야, 아재 개그도 아니고"


"네가 알아들었잖아. 그러면 성공한 거지"


"엄마 수년간의 경험을 통해 나니깐 알아듣는 거야. 다시는 어디 가서 그런 개그 하지 마 알았지?"


나의 썰렁한 개그에 작은 아이가 재미없다는 표정을 고 있었다.




"엄마~ 엄마~"


"왜에?"


주방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여기 안방 화장대 위에 있는 노란색 로션 왜 안 써? 나 한 개 주면 안 돼?"


"그거 아까워서 아껴 쓸라고 냅둔건데 니 필요하면 한 개 주고"


"엄마 또 그러다가 저번처럼 유통기한 놓쳐서 아깝다고 다리에 열심히 바르지 말고 부지런히 얼굴에 발라. 엄마는 얼굴 피부에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어"


"그러게 예전에 왕할머니가 애끼다 똥 된다 그러셨는데 또 그짝날라"


"엄마 그리고 이제 그만 잊어. 그 정도면 미련이고 집착이야"


나는 여름 부터 화장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란 로션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할머이 그거 얼굴에 바르는 뭐여?"


"이거 동동구르무"


"동동구르무? 이름이 귀엽네. 근데 그건 어디에 좋아?"


"어디에 좋긴. 찬바람에 볼따구도 안 갈라지고 들 춥지"


"왜 볼따구가 갈라져?"


"왜긴 몸에 지름기가 없어 그라지"


"그럼 기름기가 있는 걸 먹으면 되잖아"


"먹을기 없어 몸에 지름이 낄 새나 있었나. 느 애비 봐봐라. 못 먹고 지게를 하도 마이 지서 키빼기도 짝고 뱃가죽이 등짝에 붙었잖나"


"그라믄 로션을 푹푹 바르면 되지"


"이잉, 그때 그른 게 어딨 나? 지금이나 이래 동동구르무라도 있지. 옛날엔 춥기도 우째 그리 추웠는지 벽에 걸어 논 기저귀가 흔들흔들 그네 뛰듯이 웃풍도 씨지, 이불이라고 해봤자 지금처럼 좋기나 하나 이불도 시원찮지, 낭구 해오기 힘드니 장작 애끼느라 구들장도 미지근하지. 그라니 찬바람불기 시작하믄 아고 어른이고 볼따구고 손등이고 쩍쩍 갈라져서 피가 나믄 요강에 뜨뜻한 오줌을 받아 손도 담그고 세수를 하믄 손도 따시지고 얼굴도 말꼬롬하니 좋아진다 소문이 나서 이 집 저 집 색시들이 오줌을 받아 씻고 그랬지"


"허헉, 오줌을? 드러워서 우뜨케 그걸로 세수를 해? 병이 걸렸음 우쨀라고?"


"드릅긴 뭐가 드루워. 지 오줌 갖고 세수 하는디"


"그럼 할머이도 할머이 오줌 받아서 세수를 했었어?"


"그라무 마이 했었지. 그래도 요새는 이렇게 동동구르무가 나오니 을매나 좋나"




"이 마한 것들. 누가 이래 저지레를 해 놨나?"


할머니의 단전부터 끌어올린 듯한 역정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서 확성기 소리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이 마한 것들이 썼으믄 뚜껑이나 잘 닫아 놓던지. 남 애끼는거를 이래 다 퍼 제끼 놨네. 이 누즈는 와 또 뚜껑을 그냥 닫아가꼬 다 뭉개 놓고. OO 니가 이래놨나?"


"아니, 할머이 나 진짜 아닌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그라믄 누가 이 방에 드와서 이래 저지레를 해 놨나?"


나는 내 눈으로 할머니 방 상황을 보고 놀라면서도 오늘은 내가 범인이 아니기에 아주 오랜만에 지나치리 만큼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범인은 오늘 아침부터 소리 없이 강하게 사고를 치기 시작한 여동생이었고 낮엔 또 무슨 맘에 그랬는지 막 깨끗하게 보수공사를 끝낸 옆집 화장실 문짝과 벽에다 색색이 크레파스로 삐쭉빼쭉 상형문자 같은 낙서를 옴팡 해 놓아 옆집 어른들과 우리 집 어른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낙서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 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있다가 장마에 화장실 벽이 무너지고 난 뒤 철거 되는 사연을 갖게 되었다.  




산골의 긴 긴 겨울밤이 지나가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온 동네에 솔가지 타는 냄새를 망토처럼 두르고 나면 연기 때문인지 조금 더 높게 떠오른 해님 때문인지 처마 밑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에서 똑, 똑, 똑, 하며 물방울이 한 방울씩 마당으로 떨어졌는데 또 너무 추운 날은 지붕에서 녹아 흐른 물이 고드름을 타고 흘러 떨어지면서 다시 얼어 마당 바닥엔 거꾸로 고드름이 생기기도 했다.


매일 아침 우리 집의 일상은 아침상을 물리고 어른들이 아침마당을 보시며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나시면 엄마는 아침 군불로 데운 가마솥뚜껑을 열어 뜨뜻한 물을 한 양동이 받아주셨고 아버지가 세수를 하시고 나면 언니, 막냇동생, 여동생, 그리고 나의 순서로 씻는 일정이 있었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가 아닌 뒤죽박죽 순서는 거역할 수 없는 규칙이자 법과 같았는데 그 이유는 가장 잠을 험하게 잔 결과를 보여주는 나의 산발머리와 항상 밍기적 거리며 게으른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온 식구가 한 바가지씩의 물을 이용해 씻고 나면 는 그 씻은 물을 꽁꽁 언 수돗가에 버리지 못하고 마당 구석에 있는 향나무 화단에다 부었는데 그 덕분에 겨울 내내 향나무 아래는 세수비누 색깔을 닮은 좁은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고 진짜로 썰매라도 타고 놀면 좋았겠지만 향나무 구석에 반쯤 드러난 석관의 각진 모서리 때문에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머리 깬다고 엄마가 하도 신신당부하셔서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도 없는 금지 구역이었다.(그 석관 이야기는 다음에 또 전해 드리는 걸로)




나의 동동구루무

여름의 어느 날부터 화장대 위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딸네미가 탐을 낸 동동구루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뚜껑을 열었다.

사진 속의 이 동동구루무는 내가 정말 좋아하던 친구가 준 선물이었는데 받고서 고맙다 제대로 인사도 전하지 못한, 이 선물이 그 친구에게서 받게 될 마지막 선물이 될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아니, 이별이란 단어는 상상한 적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어서 외면했던 것도 맞지만 갑자기 이별은 찾아왔고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우리가 되었다. 나는 너무도 갑작스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넉 달도 넘게, 지금도 여전히 뿌리치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미련과 아쉬움을 담고 살고 있고 바닥에 적혀 있는 유통기한을 보면서 어쩌면 이 노란 아이하고라도 헤어짐을 최대한 늦춰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시절 지금 나의 손바닥 보다도 작았던 할머니 얼굴. 가마솥에 데운 따뜻한 물에 특유의 푸하푸하 소리를 내시며 세수를 하고 온 할머니가 김이 폴폴 나는 얼굴에다 동동구루무를 바르면 나무기둥에 사포를 문지르는 썩, 썩 하는 소리가 났었다. 할머니의 주름이 펴지던 소리였는지 손바닥의 굳은살이 주름에 걸리는 소리였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사계절중 겨울철에만 겨우 바르시던 그 동동구루무가 할머니 미용 제품의 전부였던, 벽에 걸린 뿌연 네모난 거울이 전부였던 할머니의 초라했던 화장대가 왜 이제야 생각이 나는걸까? 그리고 조금은 어수선하고 비좁아 보이는 나의 화장대에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나의 푸석한 얼굴을 위해 친구가 마지막으로 선물로 준 나의 동동구루무를 바르며 거울 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동동구루무를 바르고 있는 할머니 얼굴이 보여 피식 웃었다.

나에게 동동구루무가 남겨준 것도 역시 그리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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