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바라기 Feb 09. 2024

야나할머니와 가요무대

노래로 남아 있는 그 밤의 풍경

"야야 어제가 공일이니 오늘이 워료일이제?"


"어 할머이 오늘이 월요일. 근데 월요일이 왜?"


"왜긴 오늘 지녁에 가요무대 하잖나"


"할머이 맨날 자느라고 다 보도 못함서"


"이잉 자긴. 내 김동거이 얘기랑 다 듣고 있는데"


"듣고 있다믄서 코는 왜 고러?"


"코를 골긴 누가 고러. 느 애비가 고는 소리겠지"


할머니는 매일 코를 골며 주무시는데 당신은 절대 코를 골지 않는다고, 내가 맨날 거짓뿌렁 한다고 우기신다.




"할머이 눈 떠봐 가요무대 나와"


"가요무대 벌씨 한다고?"


나도 할머니를 따라 지직 거리며 흔들리작은 화면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할머니는 또 코를 골고 계시길래 슬그머니 텔레비전을 껐다.


"이 마한, 내 듣고 있는데 와 끄나?"


"히히 할머이 안 자고 진짜 듣고 있었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할머니가 음정 박자 다 초월하신 잃어버린 30년, 울고 넘는 박달재, 시골영감 노래를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뭘 하시냐고 여쭈니 가요무대 보고 주무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답을 듣고 나는 오늘이, 겨우 월요일이라는 것에 상심했다. 시어머니와 할머니는 기대하며 기다리시는 월요일 밤. 그리고 나에겐 아직도 먼 토요일.


드디어 집안일을 마치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진행 중인 가요무대에서 멈췄고 아는 노래가 나오길래 즉석 노래방을 열었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또 넘어간다]


"엄마 구전가요도 아니고 무슨 창법이야?"


"이 노랜 이렇게 타령조로 불러야 제 맛이야.  노래 웃기다 생각했었는데 오늘 가사를 자세히 보니 웃을 일이 아녀 뭔가 심오해. 이 가수야말로 진짜 백세 시대 산증인 가수다.  가요무대 진짜 재밌네.


"엄마도 가요무대가 재밌어지면 저기 방청석에 앉아 있는 할아줌아들처럼 방청 신청하는 거 아냐? 엄마 절대 그러지는 마. 근데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나오는 저 가수 한복 완전 엄마 스타일이네"


"이거 왜 이러셩, 나름 애국자야. 저 댑따 큰 무궁화 안 보임?"


요 며칠 나의 옷 구매를 위해 작은 아이를 졸라 세 번이나 의류 매장에 갔지만 의견 차이로 허탕을 쳤고 아이는 그런 나의 취향과 옷맵시에 대한 지적과 불만으로 나는 기가 죽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무궁화로 강하게 어필하였으나 다시 화면을 쳐다보니 ! 죄송한 말이지만 진짜 북한 방송 보는 줄 알았다. 흐헉! 아이 눈에 보이는 나의 패션 감각이 저렇게나 대범(?) 하단 말인가?




오늘따라 재밌어진 가요무대.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방 구들장에 배를 대고 엎드려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텔레비전을 보던 그 자세로 전기장판에 엎드려 세월 따라 변한 연예인들을 확인하며 가요무대를 즐기고 있었고 그런 내가 웃기는지 작은 아이가 같은 자세로 흉내를 내고 있었다.

잠시 후,  곡의 노래 부르다 보니 어깨도 결리고 허리도 묵직하게 아파왔다. 역시 사람은 바른 자세가 중요한 걸 또 깨달았다.

그리고 참 신기한 일.

노래를 듣고 있다 보면 노래를 듣던 그 시절의 나로 그 감정으로 데려다 놓는 마법이 있다. 졸리는 눈을 부릅뜨며 할머니 옆에 엎드려 텔레비전을 보려고 애썼던 그 밤의 풍경이 바로 어제일처럼 노래로 남아있다.

백세 인생의 이애란 가수

사진 출처: 가요무대 다시 보기 화면 캡처

작가의 이전글 야나할머니네 꽁맨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