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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r 09. 2024

야나할머니네 구들장 이야기

뜨끈하고 포근한 온도를 기억하며

"엄마 조용히 등 뒤좀 봐"


저녁을 먹고 전기장판서 몸을 녹이고 있는데 옆에 누워 있던 작은아이가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목소리 말했다.


나는 장판에 척하고 들러붙은 무거운 몸을 끄응하고 돌려 등 뒤를 보니 이런 모습을 떡실신이라고 하려나? 앙꼬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얘도 뜨신가 봐"


대표집사인 작은아이는 귀 밝은 앙꼬가 혹시나 잠에서 깰까 사진을 조심조심 찍고 있었는데 앙꼬는 처음엔 카메라 소리를 듣고 귀만 살짝 움직이더니 그 뒤로는 아예 듣지도 못하고 계속 잠을 잤다.


졸리다옹


"우리 집 전기장판은 앙꼬랑 나 때문에 이미 뽕은 뽑고도 남았어"


"따뜻한 잠깐은 좋은데 나는 밤새 자고 나면 몸이 더 피곤한 거 같아. 근데 엄마 안 뜨거워? 온도 좀 낮출까?"


"아니 낮추지 마 지금 딱 좋아"


"엄마 딱 좋긴. 이러다 앙꼬도 나도 화상 입겠어"


어쩐지 오늘 할머니방과 찜질방에서나 느끼던 뜨끈함이 느껴져 딱 좋다 생각했는데 전기장판 온도를 보니 양쪽 다 고온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얼른 온도 낮췄다. 그리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물 한잔 마시고 오니 내가 누워 있던 바닥은 금세 식어 있었다.


"전기장판이 꼭 나 같네. 금방 뜨거웠다 금방 식어버리는 변덕쟁이맨치로. 전기장판이 암만 뜨거워도 구들장은 쫓아가지. 구들장 같이 은근히 따뜻한 사람으로 늙어가면 좋겠다."


"엄마 슬퍼하지 말고 흙침대를 사. 별 다섯 개. 앙꼬는 여전히 떡실신이니 전기장판도 그리 나쁜 건 아니야"


나는 작은아이의 위로에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할머이  할머이 클났어. 할머이 방에 산신령이 나올라고 해"


"이 마한 것 또 뭔 소리 하나"


"할머이 진짜 클났대니. 빠리 와봐. 연기가 점점 더 나"


"또 뭘 갖고 이래 난리를 치나?"


할머니 방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한 채 쇠죽 간을 향해 소리치는 나의 성화에 앞이 막힌 파란 슬리퍼 소리를 내며 오시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 좀 봐봐"


문풍지에 단풍잎과 은행잎이 붙어 있는 할머니 방문을 힘껏 열자 매캐하고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흘러나왔다.


"이런 구들쨍깨졌잖나"


전깃불을 켜고 방바닥을 보니 장판과 장판이 겹쳐진 사이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제 해질 무렵 우리 집 삼 남매와 작은집 두 형제까지 모두 할머니 방에 모여 성냥개비들을 누가 더 이 쌓나 내기를 하고 있었다. 쇠죽을 끓이시던 할머니는 숯이 어느 정도 익었는지 화로를 내오라고 부르셔서 옮겨다 드리고 이젠 맘껏 뛰어놀아도 되겠다 싶었던 나는 동생들이 좋아하는 술래잡기를 하자 했고 서로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입 밖으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방안을 후당 거리며 뛰어다니자 방문에 비치는 정신없는 그림자들을 보시며 할머니가 밖에서 소리치셨다.


"이 마한 것들. 가매이 앉아서 안 노나? 구들째이 내려앉는대이"


나는 지펴진 쇠죽불에 스멀스멀 따뜻해져 오는 발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할머니 당부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더 힘껏 신나게 뛰었고 그때 뒤꿈치 부분에서 뿌걱하는 느낌이 었지만 느낌적인 느낌일 뿐 모른척하고 더 열심히 술래를 했다.




아침 쇠죽불에도 괜찮던 구들장은 오늘 낮에 뛰어놀던 나의 힘찬 발길에 완전히 내려앉았고 갈라진 시멘트 틈과 덮어 놓은 장판 사이로 스멀스멀 올라온 매캐한 연기는 방의 모든 침구류와 의류들에 연기 냄새와 그을음 냄새를 남겨 놓았다. 

할머니 방 바닥은 따뜻했지만 방안의 연기를 밖으로 빼내야 했기에 양쪽 문을 열어 놓아 잠깐만 앉아 있어도 코에 콧물이 맺히고 코가 빨개지는 한기가 느껴졌고, 손주 다섯이 놀았지만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은 나였기에 그 모든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 엄청난 사건으로 작은집 동생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한동안 우리 집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학교 동네에서 시멘트를 한 포 사 온 아빠는 바닥에 있던 가구들과 물건들을 마당으로 꺼내고 장판을 걷고 금 간 시멘트 바닥을 걷어 내셨다.

방바닥엔 네모난 구멍이 생겼고 그 속에는 새까만 그을음을 잔뜩 뒤집어쓴 깨진 구들장이 보였는데 아빠는 새로 준비한 넓적한 돌을 잘 맞춰 넣으시고 진흙으로 틈을 꼼꼼히 발라주셨다. 그리고 아궁이에 솔가지를 태우자 산신령이 나올 것 같던 방바닥 연기는 시원하게 굴뚝을 통과해 파란 하늘로 높이높이 올라갔다.


며칠 뒤 시멘트가 발라지고 또 며칠이 흐른 뒤  장판이 덮이고 할머니 방은 그렇게 정리가 되었는데 그 덕분에 다마놀이(유리구슬)를 할 때도, 물이라도 쏟으면 아랫목으로 마구 흘러가던 속도가 느슨해졌고 성냥개비를 쌓기에도 더 훌륭한 바닥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일은 퐁퐁 솟아나는 연기 때문에 할머니 방을 보수하는 동안 할머니가 우리 방에 와서 주무셨는데 무슨 일인지 우리 방에서도 할머니방 냄새가 나고 할머니 방에서도 할머니 냄새가 났다.

할머니에게서 나던 그 특유의 냄새들.

약초 냄새, 대추 냄새, 멸치 냄새, 파스 냄새, 로션 냄새, 청국장 냄새 등 냄새로 기억되는 할머니 이야기들. 밤마다 해 주시던 옛날이야기들도 아련하게 스쳐지나 간다.

특히나 오랜 시간 할머니 보라색 조끼에서 나던 청국장 냄새. 의식의 흐름대로 오늘은 멸치를 통으로 넣은 청국장을 끓여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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