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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r 01. 2024

야나할머니네 더위 팔기

에어컨아 부탁해


그 무겁던 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소나무 가지가 휘도록 무거운 눈이 내리고 그 눈이 거짓말 같이 사르르 녹던 그 구름사이로 뜬 달이 오동통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보 보름이 언제지?"


"이마 토욜일걸"


"그래서 구름 사이에 달이 밝구나"


그러고 나는 그날의 대화를 깜쪽 같이 잊었다.




6시 40분이면 집을 나서는 작은 아이 덕분에 요즘 나의 삶은 조기 기상을 당하고 있고 휴일 아침 운동삼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집에 도착해서야 오늘이 정월대보름인걸 인식했다.


나의 양가는 시골에다 농사를 지으셔서 어른들은 절기 따라 움직이시는 삶이시기에 내게도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정월 대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기침은 하셨을 것 같아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 올해도 여전히 숙제 검사 하시 듯 어제 오곡밥에 나물은 먹었냐고, 오늘은 흰밥에 김은 먹었냐고 물으셔서 홀딱 잊어 아무 준비도 못했다곤 차마 말씀드리지 못 하고 아범이 피검사를 가야 해서 금식이라고 안 먹었다고, 이따가 먹는다고 둘러대고 통화를 끝냈다.


"여보오~"


"왜?"


"내 더위 사라고"


"응 그래 아주 고마워"


남편이 올해도 또 당했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친정에도 전화를 드리니 아부지가 받으시곤 동네서 어제 윷놀이도 하시고 오곡밥도 드셨다고 하시면서


"더위는 팔았나?"


"그러엄, 누구한테 팔았게?"


"나는 아니고 OO 이한테 팔았나?"


"아니, 가는 안즉 일나지도 않았고 이서방한테 팔았지"


"이서방한테 더위를 팔믄 쓰나?"


"그럼 누구한테 팔아?"


"유리창 열고 아무한테나 팔지. 아님 내가 사줄까?"


"아빠 오늘 토욜이라 아직 길에 사람 없어. 그리고 더위는 밭에서 일하는 아빠가 조심해야지. 에어컨이 빵빵해서 이서방 더위 안 무"


나의 농담에 아부지가 웃으셨다.




"니 낼이 뭔 날인지 아나?"


"할머이 낼 보름이라 매"


"그냥 보림 아니고 증월대보림. 낼 느 성이나 동무가 이름 부르거든 냉큼 대답하지 래이. 니한테 더우 판다."


"응"




"OO아 OO이 거 있나?"


"네에"


"히히 내 더우 사래이"


할머니는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더위를 파시곤 혼자 웃음보가 터지셔서 손등으로 콧물을 훔치셨는데 어쩐지 평상시엔 이름 대신 야야, 늬들이라 부르시는데 특별히 이름을 부르신 것을 감지했어야 했는데 그걸 놓쳤다.


"할머이 나빠. 왜 내한테 더위를 파는데"


"니 어젯밤에 내가 동무나 아무나 니 이름 부르믄 대답하지 말라 알구칬는데 까묵읐제? 내한테 더우 한 개만 샀으니 동무들 더우까정 다 사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래이"


"두고 봐 내가 더위를 한 개 샀으니 두 개 팔믄 되지"




"OO아~"


아빠가 부르셨다.


"네에"


"내 더위 사라"


나의 본능적 대답에 나는 더위를 또 샀고 언니와 동생들은 그런 나를 보고 우스워 죽는 상황이었다.


"다들 나빠. 내 인제 대답하나 봐라"


"OO아~"


"..."


"OO아"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못 들은척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OO앗"


세 번째 엄마 목소리 톤이 높아져 있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또 대답하지 않고 텔레비전에 흠뻑 빠져 있던 그때 번쩍하고 등짝에 번개가 쳤다.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우째 그래 못 들 은척하고 앉아 있나?"


"엄마도 나한테 또 더위 팔까 봐 그랬지"


엄마는 나의 어이없는 대답에 웃음이 터졌고 얼음이 조롱조롱 붙은 수저통을 들고 들어오던 언니가 얼음을 떼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간나야 더위는 하루 종일 팔고 사는 게 아니라 해뜨기 전에만 팔 수 있어"


"진짜?"


언니의 말에 내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할머니가 아빠가 내게 더위를 팔았을 땐 분명 이미 날이 밝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통화를 끝내고 우리 사 남매와 배우자들이 함께 있는 카톡방에


"이 보시오들 내 더위 사시오 흐흐흐. 오늘이 정월대보름이라네"


라고 올렸더니


"헐... 내 더위 니 더위 다 사가라 ㅋㅋ"


라고 막냇동생이 답을 남겼고


"ㅋㅋㅋ 다들 답을 안 하는데... 처남이 사버렸네. 더위 맛나게 드셩"


남편이 대답 뒤에 이어진 막냇동생의 대답


"ㅎㅎㅎ 살이나 빼게 다 사지 뭐 ㅋㅋ"


"오늘이 그 말하는 날인 거 까먹었네. 더위는 안 사도 넘쳐"


라는 언니의 대답과


^^라고만 쓴 동생의 대답이 올라와 우리는 진짜 약았다며 한바탕 웃었다.




이제는 귀밝이 술도 부럼도 더위 팔기도 추억 속에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달이 오동통 해 질 때마다, 그때 와그작하고 부숴 먹던 강정의 맛을 다시 느낄 때마다, 아직도 이렇게 식구들과 더위 팔기로 웃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더위를 별로 타지 않는 체질을 가지셨었는데 그 유전자 소인 때문일까? 나도 더위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여름을 보내며 나는 대한민국의 기상이변에 진짜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올해 여름은 얼마나 더울까? 올해 남편에게 팔은 더위도 해 뜨고 난 뒤 판 더위라 효력은 없을 테고 나도 에어컨의 힘을 빌어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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